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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gowords Jun 26. 2024

끈적한 우울감

내 안 저 깊은 곳, 웅크린 채 숨어 있던 우울감이 다시 기어 나온다. 스멀스멀, 사각사각, 마치 목질화된 나무기둥을 열심히 갉아먹으며 배를 불리는 작은 벌레들처럼 온몸을 기어오른다.




발버둥 칠수록 늪에 빠지는 발처럼, 어찌해 볼 수 없는 무력감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길 몇 주, 이런 식으로 계속 끌려들어 갈 수는 없다는 위기감에 침대 위 널브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본다.


싱크대에는 냐옹이들 캔을 따줬던 접시들이 쌓여있고, 드럼세탁기 앞에는 지난 시간 열심히 입고 벗었던 빨래들이 엉켜있다. 힐끗 쳐다보지만, 이내 무표정한 낯으로 욕실에 드러 선다. 


집을 빠져나와 도착한 일요일 낮의 투썸. 햇살이 들어오는 큰 통창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방에 챙겨 온 불렛 저널을 꺼낸다. 지난 3개월간의 기록.


어느 기록에서는 형광펜을 들어 하이라이트를 치고,

어느 기록에서는 오늘에서야 드는 소회를 덧붙이기도 하면서 읽어나가길 얼마, 문득 속이 답답해져 온다.


뭐가 이리도 하지 말라는 게 많고, 해야 된다는 게 많은지. 그리고 왜 그 내용은 반복되기만 하는지


울컥해진다. 내 생활이 너무 절박해서, 그리고 숨이 막혀서. 아등바등하는 스스로가 불쌍해지고, 이런 현실에 반발심이 들고, 그럼에도 딱히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아 도무지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래. 내 무력감은 내 삶을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마음에서 오는 걸 지도 모르겠다. 


하겠다고 해 놓은 일들 중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한 채로 오늘에 이르렀다. 앞으로는 과연 할 수 있는 걸까? 오지 않은 시간들이 의심스럽다. 끝내지 못해 남아 있는 일들이 마치 나에게 받을 것이 있다며 줄 서 기다리는 빚쟁이들 같기만 하다.


억울해지는 마음에 이번엔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해낸 것들이 뭔지 찾기 시작했다. 


내가 가치를 두고 애쓰고 고민했던, 시간을 투자했던 일들 말이다.


개인적인 삶과 회사 업무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고, 그중에서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것들을 합쳐 나갔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개인적인 삶에서는 내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공부와 시도들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콘텐츠의 방향성을 깨닫고 그것에 맞는 플랫폼을 찾아 조금씩 시도해 보는 과정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과정'이라는 것의 속성이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순간,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고행의 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처음엔 호기롭게 나서지만, 이내 곧 지치고야 마는 그런 길. 묵묵히 갈 수 있는 힘은, 그저 오늘 하루 걷기로 했던 길을 걷는 것, 해야 되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그 길을 걷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과 의도를 기억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회사 업무적으로는 부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과도기적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시도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인정을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 아리송함과 그 속에서 소진되어 가는 느낌, 무엇을 위해 고민하고 애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들이 흘러넘치면서, 나를 구속하고 옭아매는 것들에서 그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나는 이내, 작은 우리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어깨를 웅크리는, 작게 몸을 말고 숨죽이고 있는 야생호랑이가 된다.


긴장하는 몸을 느끼고 있길 몇 분, 문득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닫는다.


아, 나는 이 삶을,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기대할 것이 없어진 내일을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이어서 또 다른 말이 떠오른다.



두려워 말라. 너는 곧 자유로워질지니. 어깨를 펴고 웅크린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활짝 켜고 우리를 박차 마음껏 초원을 달리게 될지니, 그 앞에 너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지리라.



숙인 고개 사이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한동안 울고 나니, 내게 달라붙어 있던 끈적한 무기력과 우울감이 많은 부분 씻겨 내려간 느낌이다. 무겁게 눌려있던 가슴은 짐을 덜어낸 가방처럼 가벼워지고 숨쉬기가 한결 편안하다. 짓눌렸던 내 마음은 좁은 우리를 벗어나 초원을 홀가분하게 달리는 야생호랑이의 자유함으로 채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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