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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선 윤일원 May 19. 2024

미더운 말은 꾸미지 않아도 좋아

장차 배반하려는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무슨 말을 할까? 오늘이 노자 <도덕경> 제81장 마지막이다.


이제 아들이 장성하여 집을 떠나려 한다. 한번 떠나면 자주 오기 힘든 시절, 어머니가 이런저런 어색함을 달래려고 의미 없는 온갖 말을 쏟아 낸 다음, 가장인 아버지가 헛기침한 후 드디어 마지막 당부를 한다.


“몸조심하고, 차 조심해라”


무엇이 가장 소중한고? “친구를 잘 사귀어라. 돈을 아껴라. 공부 열심히 해라.” 아니다. 밖으로는 사고가 없었으면 좋겠고, 안으로는 그저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맘이다.




첫 번째 당부, 언변(言辯)의 허구다.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 착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악한 사람은 변론한다(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노자 제81장)


언변(言辯)에 현혹되지 말라. 내 말 '노자'도 그러하지만, 남 말 '유가'도 그러하다.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니, 말보다는 실천을, 실천보다는 덕을 보라. 그러면 그 사람이 보인다.


장차 배반하려는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마음 가운데 의심이 있는 자는 그 말이 가지를 치고, 장차 좋은 일이 있는 자는 그 말수가 적고, 장차 조급한 자는 말수가 많고, 착함을 위장한 자는 그 말이 왔다 갔다하고,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에 굽신거림이 있다.


<주역>의 마지막 문장,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나와 있는 글이다. 노자의 말과 궤를 같이 한다.



두 번째 당부, 지(知)의 모순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면 얼마나 알며, 모른다고 하면 얼마나 모를까?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은 상식, 그래서 저절로 겸손해 진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부류, 그 사람이 바로 경솔하고, 천박하고, 위선이라 사회에 해악질이 된다.


“안다는 것은 두루 아는 것이 아니요, 두루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知者不博, 博者不知).”


지식 너머에 존재하는 도다. 본질을 알지 못하고 변죽만 울려 천차만별을 논하지만, 그것이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면 죽은 지식, 죽은 지식인이 된다.


나라가 망할 때 지식인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기존 질서에 도전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글을 남긴다. 그 글은 후세에 수없이 인용되지만, 붕괴의 역사는 피할 수 없다. 다른 부류는 그 예민함으로 운다. 이 울음은 나라의 영광이 사라지는 아쉬움의 울음이며,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초라함에 우는 울음이다. 울지 않으면 지식인이 아니다. 이 둘을 제외한 변설은 모두 가짜다.




세 번째 당부, 부쟁(不爭)의 역설이다.


다툼은 모두 이해(利害)에서 나온다. 이익이 있는 곳에 웃음이 있고, 손실이 있는 곳에 울음이 있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적과도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지만, 손실을 앞두고는 수십 년 친구와도 손절한다. 언제나 이익의 행복감보다 상실의 절망감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


“성인은 담지 않는다(聖人不積).”


무엇을 담지 않아야 하는가? 낳은 자식이요, 행한 은혜요, 이룬 공이요, 이해의 그릇이다. 이것을 곳간에도 담지 말아야 하고, 마음에도 담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삶이 더욱더 여유로워지고, 행복이 더욱더 많아진다.


무릇, 어떤 사람은 <노자>가 경쟁에 뒤처진 패자(敗者)의 도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등진 은둔자의 변이라 한다. 하지만 노자는 가난한 자의 위안서도 아니요, 약자의 변명서는 더욱 아니다. 강한 자, 있는 자, 부귀한자가 덕을 쌓으라는 강한 실천 덕목이다.


#노자 #도덕경 #신언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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