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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선 윤일원 Jun 07. 2024

철원 대마리 마을 '지뢰꽃'을 아세요?

피 흘려 찾은 땅, 피땀 흘려 개척했다.

이스라엘 집단 농장 공동체 이름이 키부츠 (kibbutz)다. 개별 농업이 불가능한 특수지역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농장이다.


‘특수’ 지역이란 군이 내 생명을 지켜줄 수 없을 때 내 스스로 국토방위를 하면서 생업에 종사해야 하므로 그런 형태로 발전한다.


대한민국에서 국방부가 국민의 생존을 책임지지 않는 곳이 있을까? 있었다. 1952년 추석 이후 사흗날 딱 10일 동안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 접경지역 대마리(大馬里) 마을이 그곳이다.


“군대가 머문 자리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대군이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온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노자> 제30장)


노자는 2600년 전 사람이라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군대가 머문 자리에 가시덤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이한 꽃이 하나 더 있었다.



“붉은색, 녹색, 자줏빛, 비췻빛, 옥색, 담황색, 단향목색, 흰색, 얕은 멋, 깊은 멋, 성글게 심은 꽃, 빽빽하게 심은 꽃, 새로운 꽃, 묵은 꽃, 일찍 피는 꽃, 늦게 피는 꽃, 저물 때 피는 꽃, 새벽에 피는 꽃, 갠 날 피는 꽃, 비 올 때 피는 꽃 등등. 온갖 꽃들이 찬란하게 어우러져 빛깔을 뽐낸다.”


조선 후기 불운한 3대 천재 중 한 사람인 이가환(李家煥)의 <기원기>에도 없는 꽃이며, 나 또한 여태 본 적이 없는 꽃이다.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 없는 꽃”


지뢰꽃. 그랬다. 정춘근의 시 <지뢰꽃>이다. 철원 대마리 마을은 30만 발의 포탄을 고스란히 가슴에 안고 가시나무가 무성해지고 억센 칡덩굴이 땅을 점령했지만, 사람의 발길을 끊게 만든 것은 그것이 아니라 지뢰와 불발탄이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매설된 엄청난 양의 지뢰와 불발탄은 ‘접근금지’로 인간에 경고장을 보내면서 그렇게 15년이 흘렀지만, 조국은 무슨 천형(天刑, 하늘이 내린 벌)에라도 걸린 듯 여전히 가난했다.


그럴 때 의심한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지! 무슨 셈이라도 남았나?” 그렇다. 아직 셈이 남았다. 조국의 근대화. 전쟁보다 더 어려운 ‘가난의 탈출’이라는 숙명을 대마리 마을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67년, 자유 대한민국은 최 접경지역 철원 대마리 마을을 ‘전략촌’으로 꾸미기로 결정하고 정착민을 모집한다. 전략촌이란 “우리가 너네보다 더 살아” 하고 북한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심보로 만들어진 그야말로 전략촌이다.


“전국에 땅 없는 이들이여, 여기로 오라. 가구당 서른 마지기는 너끈히 준다.”


전쟁과 가난의 차이는 단 하나, 전쟁은 바로 목숨을 끊게 하지만, 가난은 서서히 말라 비틀어 죽인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기회가 있다면 어디엔들 못 가리. 그렇게 제대군인 150명이 모여 한국 최초로 이스라엘형 키부츠가 만들어졌다.


“낮에는 경작에 투입하고, 밤에는 경계에 투입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불발탄 지뢰에 8명이 사망하고 7명의 발목이 날아갔다.


지뢰탐지기가 없었냐고? 왜 없었을까 보다. 허름한 미제 라디오를 뜯어 나무통에 넣고 엉성한 선 하나를 리시버로 연결하여 이리저리 흔들다 보면 바늘 끝처럼 귀를 찌르는 진동이 들리니 그것이 바로 지뢰. 인간 지뢰탐지기들, 그들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서나 겨우 듣던 ‘frontier’ 정신으로 대한민국의 ‘frontier’를 넓혀가는 중이었다.



대마리 마을 입구에 큼직한 비석이 있다. 정면에 “개척비”라 쓰고 옆면에 “피 흘려 찾은 땅, 피땀 흘려 개척했다.”라고 쓰고 뒷면과 아랫면에 빼곡히 첫 삽을 뜬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으며, 그 아래에 담대한 비전을 담았다.


“해마다 팔월삼십일이 되면 백마고지 전투 전몰장병 위령제를 올리고 갈 수 있는 휴전선까지 마라톤 경기를 행하는 아직은 가칭인 백마제를 갖으며 백두산까지 뛸 소망을 안고 성씨 고향이 달라도 뜻을 모아 자연석 한 덩이를 골라 비석을 세운다.”


옳구나, 전국이 국가 개조로 들썩이던 그때 철원 평강고원 한 모퉁이도 남모를 희생과 개척 정신이 있었으니, 오늘날 풍요를 그저 가져다준 국토가 단 한 뼘이라도 있다면 말해보라.


지금 대마리 마을은 철원 오대쌀의 발원지가 되어 전국 쌀밥 아줌마의 성지가 되었으며, 두루미가 예전의 아픈 기억을 잊고 날아드니 평화마을이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 오호라 상전벽해란 이곳을 두고 한 말이리라.


#백마고지 #철원대마리 #철원오대쌀 #개척정신 #키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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