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글쓰기 34] 24.11.11 수면내시경 이반일리치의죽음
건강검진도 내시경 검사만 없다면 할 만하다.
막대기 같은 것이 속을 마구 휘저어 대면, 그야말로 고역이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꼴딱거리며, 침을 흘리며, 눈물을 짜며,
참으로 품위 없이, 인간 존엄이 깡그리 무시된다.
은근히 공포증도 생긴다.
그래서 2년마다 찾아오는 건강검진을 꼭 연말로 미룬다.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어서.
수면 내시경을 하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혼자 가면 해주지 않는다.
건강검진 받으러 가면서
보호자 손에 끌려가는 듯한 모양새는 아니다 싶어
수면 위내시경 검사는 로망으로 남는다.
오늘 그 로망을 실현했다.
말로 천 냥 빚 갚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보호자 없이 해결했다.
의원과 의사 모두 무궁한 복을 받을진저.
그런 게 꼭 필요한 물음인지 싶은 설문지를 작성하고,
심전도 검사를 하고,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수술할 때 하는 마취 전 단계와 다를 바 없었다.
옆으로 눕고 손등에 바늘을 꼽느라 따끔했다.
여기까지만 선명했다.
몇 사람이 오가고
목에 무언가 들어오고
뱃속이 불편하고
누군가 무어라 하고.
희미한 기억은 끝이 났다.
그리곤 한 시간,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따스했다.
다른 방이다.
아마 들고 옮겼나 보다.
마취 전 의사가 체중이 얼마냐고 물었던 게 기억났다.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에 편안했다.
이런 맛에 수면 내시경 검사를 하는구나.
이대로 푹 잠들었으면, 일어나기 싫었다.
의사가 왔다.
제시간에 깨어났나 확인하러 온 모양이다.
더 누워있다가 나오란다.
문득 죽음을 생각했다.
만약 내가 깨어나지 못했다면,
나는 불행할까,
얼마나 슬플까, 하는 것들이.
의사는 사건 처리로 골머리를 썩일 것이고,
가까운 사람들은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걸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은 행복한 죽음이었을 텐데.
레프 톨스토이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생각났다.
소설은 그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동료들은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승진 기회와 연봉 상승을 기대하고,
절친한 친구는 문상을 귀찮아하고, 아내는 연금에만 관심이 있다.
이반 일리치는 직업적으로 성공해 판사로 승진한다.
사회적인 평판도 좋다.
겉보기에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일에만 몰두하며 자신이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사소한 사고로 생긴 허리 상처가 심각한 병으로 커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병세가 악화하자 죽음의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며,
자신의 삶이 사회적 기대에 맞춰진 표면적인 성공을 좇았을 뿐,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찾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주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겉치레일 뿐이다.
그나마 하인 게라심만이 그에게 진정한 온정을 베푼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 이반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며
비로소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
수면 내시경 검사가 끝났다.
만약 내가 깨어나지 못했다면,
나를 알았던 사람들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대하지 않았을까.
내가 지금까지 장례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주일 후 조직검사 결과가 나온다.
삶의 한고비가 또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