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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이 Sep 27. 2024

여주역사여행길 17-2. 공덕비의 주인공들을 만나다.

공덕비는 대부분 개인이 주인공인데 특이하게 단체 관련 비석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니 기동보린사 창립 기념비라는 비석이 보입니다. 기동보린사는 여주 역사 이래 최초의 재단법인으로 어느 개인의 영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주 군민을 위한 공익법인체였다고 합니다. 


1926년 12월 당시 여주 군수로 있던 문태선과 흥천면 외사리에 살던 이민응은 서로 논의하여, 주민들의 생활 안정과 농촌진흥을 목적으로 기동보린사를 창설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민응은 솔선수범하여 쌀 1,000석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최영락과 최진원 등 여주지역 유지 561명도 함께 출자하였습니다. 이들 유지들이 출자한 금액은 1,800석으로, 기동보린사의 총출자기금은 2,800석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기금을 확보한 기동보린사는 매년 춘궁기 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종자와 학자금을 저리 또는 무이자로 대여한 뒤 추수 뒤에 갚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1934년에 여주읍 하리 지금의 여주농고 자리에 여주농도강습소를 창설하여 농촌의 지도자를 교육 양성하고 당시에 낙후되었던 농촌진흥 관계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도 합니다.     

기동보린사 창립기념비


기동보린사가 창립되고 유지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이 이민응입니다. 이민응은 일제강점기 여주지역의 대표적인 자선사업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천과 여주 일대에 연간 7,000~8,000석을 수확하는 방대한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멀리 제천·청주·양평 등지에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빈민구제사업으로는 춘궁기에 곡식을 배급하고, 가난한 농가에는 농토를 나누어주고 소작료를 연기 또는 면제하기도 하였으며, 끼니를 굶는 사람이 있으면 쌀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구제된 빈민은 1931년까지 모두 519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1936~1937년에 걸친 대기근 때는 기아 농민 200여 명을 1개월간 집에서 보살피기도 했다는군요. 


이민응은 개인적인 구제 사업뿐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희사해 공익사업을 펼치는 일에 앞장을 섰지요. 먼저 이민응은 1920년 3월에 현금 33,750원을 출자하여 재단법인 선린회를 설립하였는데, 선린회는 금융사업을 하는 한편, 빈민구제사업과 육영사업, 농촌개량사업 등의 자선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농촌개량사업으로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양돈·양잠을 적극 육성하는 한편, 지역 농촌개발을 위해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농도강습소를 개설한 뒤 농업기술 보급을 꾀하였습니다. 또한 이민응은 권농사를 자신이 사는 마을인 흥천면 외사리에 조직하고 현금 3,000원과 벼 170석을 출자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20원씩을 연 7분으로 대여하여 고리대금을 근절시키는 한편, 소작료도 매우 저렴한 2할만 징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잠업강습소를 설립하여 경비를 부담하고 잠업 교육하기도 합니다. 


농도강습소나 잠업강습소 같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43년에는 여주읍에 기동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현재 여주여자중학교와 세종고등학교로 발전하는 모태가 되기도 합니다. 1946년 10월 이민응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친서를 받고 성균관과 성균관대학 재단법인 설립에 참여하여 선린회 법인재산을 기부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범 김구는 이민응의 집을 두 차례나 방문하여 감사의 표시를 전하였다고 하지요. 

이민응 공덕비(흥천면 체육공원내)


이민응처럼 여주의 학교 설립에 기여한 인물이 있어 그 인물의 공덕비를 찾아가 봤습니다. 여주중앙감리교회 마당에 장춘명목사 공덕비가 있는데요. 그는 1889년 미 감리교회의 전도를 듣고 기독교에 들어왔으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의분에 찬 나머지 의병에 참여하여 왜군과 전투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의병이 해체되자 집으로 돌아와 1899년 3월 덕들 교회에서 의병 동지 구춘경과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성경을 팔며 전도를 시작하여 1904년에 여주읍 교회에 파송되었는데요. 그의 전도 사업은 단순한 신앙 차원을 넘어선 구국 활동으로, 그는 학교 설립에 뜻을 두고 1904년에 삼군에 개신학교를, 청안리에는 소성학교를, 여주읍에는 여흥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활동에 앞장섰습니다.


장춘명 목사 공덕비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대표적인 사례로 경주 최부잣집이나 우당 이회영 가문이 자주 언급됩니다. 저는 이들을 수업 시간에도 자주 언급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지역에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신정변을 다루면서 홍영식 일가족의 슬픈 이야기는 해줬지만, 홍순목과 홍만식이 여주와 어떤 관련이 있었고 그들의 행적을 이야기해준 적은 없었지요. 우리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도 저에게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이 됩니다. 기동보린사는 여주 지역 유지 561명이 참여했다는데 그 정도 숫자는 당시 여주지역 유지 대부분이 참여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이민응도 경주 최부잣집 못지않은 사례로 꼭 이야기 해주어야겠습니다. 애국계몽운동을 설명하면서 이민응이나 장춘명목사의 여주지역 학교 설립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제주도에 갔을 때 김만덕을 기리는 묘비를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1812년(순조 12)에 마을 사람들이 세웠다는 묘비 뒷면에는 “비록 옛날의 현명한 여자라 하더라도 아직 이런 일은 없었다. 칠순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과 부처를 방불케 하였고 두 개의 눈동자가 빛나고 맑았다.”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제가 본 공덕비의 내용 중에 가장 멋진 찬사였습니다. 그런 공덕비를 마을 주민들이 세워줬다는 것에서도, 글귀 내용에서도 이 공덕비야 말로 진짜 공덕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라는 것의 말의 무게도 생각했습니다.   

   

제주 김만덕 묘비 뒷면(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여주에 있는 공덕비의 주인공들도, 그리고 더 많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밝혀지고 널리 알려지도록 저 나름의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물론 공덕비라고 다 좋은 의미로 세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진실을 가리는 노력도 함께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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