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런 새다리
우리 집은 KBS 방송국이 있는 여의도 맞은편에 있다. 방송국과 멀지 않은 곳에서 18년을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니! 서울 촌놈, 아니 방송국 촌놈이다.
10년 전 긴 겨울 방학 동안 쉬고 있자니 무료함이 느껴지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TV 드라마를 보다가 나도 엑스트라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방송국 주변 에이전시(대행사)를 알아본 후 직접 찾아갔다. 초록색 코트와 베레모를 쓴 젊지 않은 여자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담당자와 잠시 인터뷰를 한 후 “돌아가 기다리시면 연락이 갈 거예요”라는 애매한 답을 듣고 나왔다. 내가 찍은 사진 중에 가장 돌연하고 과감한 모습을 신청서에 붙였는데 과연 그게 어떻게 작용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다음 날 새벽 대행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당장 올 수 없냐고. 밝은색 옷 두세 벌을 챙겨 일산 어느 슈퍼마켓 앞으로 오라고 했다. 순간 설렘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핫핑크 패딩 조끼와 새 다리 몸매가 드러나는 블랙 스키니 진을 차려입고 단숨에 달려갔다. 그 당시 나는 남편으로부터 중형 자가용을 받아 운행하고 있었다. 선글라스까지 쓰고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본 촬영 팀장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소리 높여 말했다. “어 에이스가 왔네? 지금 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봐요. 장 보는 장면부터 들어갑시다.”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고르는 여인 역할!
가게 안으로 주인공 아이가 뛰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게 고개를 돌린 나의 리액션이 좋았다는 칭찬까지 듣고 나니 무척 신이 나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나도 방송에 나오나?’
다음 촬영 장소는 김포의 어느 대형 병원이었다. 차로 1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했다. 순간 ‘이게 뭐 하는 일인 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휠체어를 탄 환자를 밀고 가는 의사 역할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흰색 가운을 입어보았다. 더 신이 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병원 구내식당 장면! 이번엔 국을 퍼 주는 식당 직원 역할을 하란다. 주인공 배우들의 반복된 NG로 국을 하염없이 푸고 또 퍼야 했다. ‘어? 이거 쉬운 일이 아니네?’
아침 일찍 시작한 촬영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중환자실 장면을 찍기로 했다. 병원의 실제 중환자들 상황 때문에 계속 대기를 해야 했다. 엑스트라들은 언제 큐 사인이 떨어질지 몰라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등의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기다리면서 촬영 팀장이 묻는다. 직업이 뭐냐고. 영어 가르치는 강사란 말을 듣고 그가 꺼낸 한마디 “그냥 선생님 하셔요. 이 일 막 노동입니다.”
그 자신도 목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뛰어든 방송 일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한숨 섞인 고백을 했다.
대기한 지 2시간이 지났고 밖의 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떨어졌다. 김밥 한 줄로 저녁들을 때우고 결국 밤 10시가 다 되어 촬영은 중단되고 말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도 끊기고 혹한의 날씨에 막막함을 느낀 사람들. 한 오지랖 하는 나는 이 사람들을 차에 태우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 7명이 탄 차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불법 탈출이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추위에 얼고 피곤함에 절어 차 안은 내내 고요한 긴장감만 감돌았다. 길치인 내가 목동부터 영등포를 거쳐 마포역까지 하나둘씩 제대로 내려줄 수 있어 다행이였다. 우리는 언젠간 다시 만나자는 못 지킬 약속을 한 채 헤어졌다.
그 후로 정확히 1달 후 나는 출연료를 직접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받아온 봉투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73520원! 너무 신기하고 소중해서 쉽게 꺼내 쓰지도 못한 채 1년 가까이 서랍 속에 고이 모셔놓고 있었다. 그날의 추었던 추억과 함께.
드라마는 촬영 후 3개월 넘어서야 방영되었다. 핫핑크 패팅 조끼의 나는 과연 브라운관을 타고 나올 수 있었을까? 나왔다 반절. 뭐가? 가게 장면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스키니진을 입은 그 다리만! 나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영광스런 검은 새 다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