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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azy ivan Apr 22. 2024

Shannon Fall

my Daniel Fall




결혼 당시 27살,

너무도 어렸던  난

날 참 많이 예뻐하셨던 시아버님께

“아버님, 저는 아들 둘, 딸 둘 낳을 거예요” 했더랬다.


오히려 시부모님은 그런 날

‘얘야 우리 아들 공부 해야 하는데……얘를 어쩌지?’

하는 걱정 어린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시며 나를 바라보셨던 게 기억난다.


맞다.

난 출산 육아를

그냥 낳아 놓으면 알아서 큰다고 생각했던

매우 무지한 애미였다.


계획대로 일단 결혼하고 이듬해

손이 귀한 집안 3대 독자 아들을 출산했고


‘아… 내가 애 키우는 데 탤런트가 없구나’를 느낀 후


차라리 힘들 때 한꺼번에 키워서

얼른 공부던 일이던 해야겠다는 생각에

15개월 터울로 둘째 딸을 낳았다.


그리고

야침 차게 ‘아들 둘 딸 둘 공약’은

시부모님 앞에서 파기해 버렸다.


“저 얼른 키워 놓고

공부를 계속하던 일을 하던 해야겠습니다.  

아이는 둘이 끝인 것 같습니다. “


물론 양가 부모님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시었다.




본가에 난 맏딸에 남동생이 하나 있다.

남편은 누나와 여동생 사이 둘째 금지옥엽 외아들.


어쨌거나 결혼 초 공약과는 달리

애를 막상 키우다 보니

내가 두자녀 가정에서 성장하여 그랬는가

내 머릿속에선 애가 셋인 집은 그려지지 않았다.


남편에게

”2번이 끝이야. 우리 집에 3번은 없어.”라고

누차 얘기 했지만

남편은 한 번도 긍정도 부정도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남편에겐 애 셋이

더 자연스러운 그림이었으리라.


어쨌거나

연년생 둘 키우는 건 말 그대로

극강의 체력전과 심리전.


사람이 잠을 자야 살지.

제대로 씻지도 못해,

화장실 일도 문을 열고 봐야해

모유수유 한다고

아무대서나 앞섶을 풀어해쳐야 하는 등

나의 존엄성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지 오래.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경험과

나라는 인격이 요상하게 부정당하고

마치 나란 존재는 온몸을 바쳐

애를 키우는 존재로서만 존재하나 싶은

기이한 경험을 시리즈로 하게 되었다.


정말 정신줄 놓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하루하루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친구가 놀러 왔다.

이민 오자마자 고등학생 때부터 절친인 친구가

정말 오랜만에 밴쿠버에 온 거다.


친조카나 다름 없다며 애들을 너무 예뻐하는 친구에게

애들 좀 보라고 하고

주방에서 점심 준비를 하다가

페이퍼 타월이 떨어져 캐비닛에서 꺼내는데

박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둘째 임신 당시 2개짜리로 샀던 것 중 하나가 남아 있었던

임신 테스터기였다.


‘날짜가… 좀 늦긴 했는데… 설마…넌센스지..‘


그 동안 피임도 하고

지랄 맞은 성격에 혹시나 싶은 날은

사후 피임약까지 사다 먹는 극성을 부렸는데….


설마…


어차피 쓸데없는 테스터, 그냥 써버리지 뭐… 하는 마음으로

테스트를 하고 무심한 듯 손을 씻었지만

눈은 계속 결과창에…


.

.

.

헐…


말도 안 돼…


두 줄???




“아아아악!!!”


내 괴성에 친구는 뭔 큰일이 났는 줄 알고 화장실로 달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야! 야야야야! 이게 말이 돼? 나 임신이래!?”


“뭐!!??”


내 친구는 눈빛은 황당과 당황 사이를 오갔고

그 날의 일은 아직도 만나면 되뇌고 곱씹는 기억이 됐다.


나는 연구실에 있던 남편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미쳤어! 미쳤어!!!!”


 “무슨 일이야!?”


 “나 임신이래 어쩔 거야!!!”


 “어????”


남편은 울부짖는 내 목소리에 바로 집으로 향했고

남편이 집으로 오는 내내

전화로 난


“못 낳아. 안 낳아!

이제 둘째 프리 스쿨 가면

나 학교 다시 다닐라 그랬는데.

안 돼.


지금 계산상 4주도 안 됐어.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못 낳아. 안 낳아!

그러니까 내가 수술하자고 그랬잖아!

엉엉엉”






여기 동네 백화점에 가끔 가면

머리는 까치집을 짓고

옷에는 뭘 묻혔는지 후줄근한

애를 주렁주렁 달고 오는 애엄마들을 보면서

내가 철없이 그랬더랬다.


“난 안 저래야지.”


아…

근데 내가 애가 셋이라니

이건 현실이 아니야.

말도 안 돼.

그래.

지금은 세포단계야.

지금은 중절수술도 필요 없어.

호르몬 주사 한 방이면 돼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 셋째를 원한다고 농담처럼 그랬었지만

막상 내가 원하지 않는 셋째를 가지고

맨탈이 정말 조각조각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이 정도로 힘들어할 줄 몰랐다고

정말 그렇게 원하지 않는다면

중절 상담을 하루라도 빨리 받자고 했다.


워킹 맘이었고 그 간 우리 애 둘 태어날 때 받아줬던

나와 라포가 꽤 있었던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가정의는

당연히 내 뜻을 이해해 줬고

바로 중절 클리닉에 연결을 해줬다.




캐나다 비씨주의 임신 중절 절차는

산모가 중절을 원할 경우

일단 가정의가 중절 클리닉에 연결을 해주고

클리닉에서 심리 상담을 거친 후

상담 후에도 산모가 중절은 원하면 절차가 진행이 된다.


계산 상 나는 임신 4-5주 차쯤으로

수술을 하지 않고

호르몬 주사로 임신 중절이 가능하다고 했다.


심리 상담이 금요일이었고

중절은 그다음 월요일로 날짜가 잡혔다.


주말 내내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셋째까지 낳으면

내 인생이 육아로 송두리째

다 바스러질 것 같다는 절망감뿐이었다.


난 오로시 나로 사는 인생을 너무 그리워했다.


‘이 시점에 임신이라니

이제 둘째 프리스쿨만 가면

난 다시 나로 살 수 있는데…‘


그렇게 월요일이 밝고

남편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출근을 종용했다.

내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그 큰 일을 치르러 가는데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남편은 단호했다.


클리닉으로 향하는 내내

둘 다 한마디를 뗄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코너를 돌면 클리닉에 도착.

그때 생각 하나가 스쳤다.


’ 나는 그냥 힘들다는 거, 그건데,

이 아이는 내가 그저 “힘들다”고 태어나지 못하는 거구나.

얘도 지금 뒷좌석에 금이야 옥이야 카시트에 앉아서

나만 쳐다보고 있는 첫째 둘째 같은 내 아인데…‘


그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 전체를 토네이도처럼 휘감았다.


“자기야. Shannon Fall 가자.”


뭐에 홀린듯 내뱉은 내 말에

남편은 말없이 좌회전 신호를 지나쳐 직진을 했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도 울었다.


마침 전 날 비가 와서

물이 어마무시하게 쏟아지던 Shannon Fall에 다다라

주차를 마치고

차 안에서 남편은 정말 너무 미안하고 너무 고맙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얼마간 마음을 추스르고

애들을 더블 스트롤러에 태워

폭포 아래까지 걸어갔다.

미친듯한 물길이 떨어지는 폭포를 올려다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다섯이다.

잘 살아보자.


그 후로 우린 그 폭포를

다니엘 폭포라고 부른다.


다니엘은

우리 막내의 이름이다.




epilogue 


그렇게

지금은 나의 최애

막둥이가 태어났다.


지가 어떻게 태어나게 됐는지 알아서였을까.


이 아이는 그 후 13년을 키우는 이 날 이때까지

단 한 번의 스트레스를 나에게 준 일이 없다.


늘 밝고

늘 재미있고

늘 황홀하고

늘 자신감 넘치고

늘 높은 자존감이 기본에 깔려 있는


난 누가 다시 태어나면 뭘로 태어나고 싶냐고 하는 질문에 늘 “나로 다시” 였는데


이 녀석을 키우면서 대답이 달라졌다.


“난 다시 태어난다면 나와 내 남편을 부모로 둔 저자식”


다행히 난 셋째로 “주렁주렁 꼬라지”를 얻은 게 아니었다.


나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나를 얻었고

궁극의 비타민제, 자양강장제를 얻었다.


첫째 둘째한테는 미안하도록

난 이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나마의 자세히 맡아야 향긋한 모성도

경험하지 못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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