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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곁에서 행복하기

by 강혜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찍 결혼해 이미 다 큰 아들딸이 있는 동창들의 이혼 소식이 들려온다. 지인의 딸은 결혼하고 아이의 돌이 되기도 전에 남편의 도박과 사채빚 때문에 이혼녀 딱지를 붙였다고 했다.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치다 보면 평범해 보이던 학생이 유독 엄마, 혹은 아빠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이혼 가정, 혹은 재혼 가정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집 건너 한 집, 이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낯설지도, 흉볼 만한 것도 아닌데 입 밖으로 별것 아닌 듯 꺼내기엔 여전히 어렵다.

삼십 년 전엔 오죽했을까. 게다가 옆집 숟가락, 젓가락 개수가 몇 개인지 훤히 알 정도로 좁은 동네에서 어느 집 부부가 한동안 큰소리치고 다투더니 여자가 짐을 싸서 나가고 남자가 평생 입에도 대지 않던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폐인 생활을 하게 됐다는 소문이 돈다면,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가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못하던, 점잖고 평판에 예민한 사람이었다면, 그 이혼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게 마련이다.

바로 우리 아빠 이야기다. 아빠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어마무시한 수식어를 가진 사람이다. 성실했고 다정했었다. 잘 웃고 장난도 잘 치는 좋은 아빠였다. 엄마와 이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삼십 대 중반, 요즘으로 치자면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말랐다고 말할 만큼 어린 나이. 아빠는 애 둘 딸린 홀아비가 되었다. 코딱지만 한 동네에서 이혼 꼬리표를 단 채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시절을 무던히 잘 견뎌냈지만 서글서글 잘 웃던 아빠는 웃음을 잃었고 꼭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온몸이 비쩍 말라버리고 말았다. 비쩍 마른 몸만큼 장난기도 말라버렸다. 늘 외롭고 쓸쓸해 보였고 어딘지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좀 챙겨 드시라, 양치도 잘하고 잘 씻으시라, 술은 좀 줄이시라 이야기해도 아빠는 거칠게 짜증을 내셨다. 들리지 않는 귀 때문이 아니라 꽉 닫힌 마음 때문에 그 누구와도 소통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럴수록 나의 잔소리는 커져 갔고 그럴수록 아빠 마음은 더 굳게 닫혀 갔다. 그렇게 아빠는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돌싱으로 살았고, 일흔 인 지금도 여전히 돌싱이다.


2018년, 어느 오후,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에서 믹스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전화를 받자 한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진아, 내 이야기 잘 들어 봐라. 큰일 났다. 아빠가 요새 이상한 여자를 만나서 사귀는데 그 여자를 만나고 나서 아는 사람들이랑 연락도 다 끊고 변했다, 변했어. 네가 아빠 좀 만나서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알아봐야 되겠는데.”


전화하신 분은 아버지가 젊었던 시절부터 성당에서 아버지를 챙겨주시던 선배님의 아내 분이셨고 명절마다 나와 동생도 챙겨주시던 좋은 분이셨다. 좋은 음식 있으면 아버지를 챙겨 저녁 식사 대접을 해 주셨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던 분의 전화라 나도 겁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인가. 법 없이도 살 사람 아니던가. 크고 작은 사기도 여러 번 당하고 돈 빌려주고 떼인 적도 많던 순수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아니던가.

아빠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평생 혼자였던 아빠 옆에 여자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런데 이상한 여자라는 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아들딸 다 길러두고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아빠가 또 까칠하게 살아갈까 덜컥 겁이 났다.


아이 키우고 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혼자 계신 아빠를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당장 아빠를 만나러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홀로 계시는 원룸에 들러 벨을 눌렀다. 그런데 몇 달 전 비쩍 말라있던 아빠가 평생 처음 보는 포동포동한 얼굴로 문을 여셨다. 아빠의 원룸 방 냉장고에 가득 차 있던 반찬통과 보글보글 끓고 있던 된장찌개, 홀아비 냄새가 나던 방에서 풍기던 산뜻한 향기. 나는 평생 처음 보는 미소로 나를 반기는 아빠를 보고 알았다. 아빠의 그분은 분명 좋은 사람일 거라는 걸. 감히 나에게는 아빠의 여자 친구에게 합격, 불합격을 따질 자격조차 없었지만, 점수를 더 줄 수 있다면 백 점이 아니라 천 점, 만점도 주고 싶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그분을 만나기도 전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운영하던 옷 수선 가게를 정리하고, 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군복 납품을 하는 일을 돕던 아빠. 공장 바로 앞에 작은 옷 수선 가게가 있었는데 수선일을 오래 했던 아빠가 옷 수선 가게 사장님의 솜씨에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두셨던 모양이다. 사장님은 이참에 일 마치면 가게에서 옷 고치는 것을 좀 알려달라고 하셨더랬다. 두 분은 그렇게 인연이 이어지셨다.

사장님은 귀가 안 들린다는 이유로 아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대하던 사람들과는 다르셨다. 친절한 목소리로 모르는 건 묻고, 잘하는 것이 있을 땐 감탄사를 날리는 사장님에게서 아빠는 존중받는 느낌을 제대로 느끼셨던 모양이다. 존중이 사랑의 베이스 아니던가.

아빠는 퇴직 후 종일 가게에서 같이 일하고 저녁 한 끼 함께 나누며 서로를 챙겨줄 수 있는 평생 친구를 만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사신다. 만날 때마다 점점 푸근해지고 다정해지는 아빠를 보면서 아빠가 사랑을 많이 받고 계시는 것이 느껴진다. 아빠의 허리 사이즈가 늘어날 때마다 아빠는 점점 더 행복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곁에 있는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도 커져간다.


아빠의 새로운 시작을 지켜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미룰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행복하겠다는 태도. 가족을 챙기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는 동안 아빠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하셨다. 고생만 하는 아빠를 보며 아빠는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만 행복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이 들 때가 많았다. 행복을 보류하며 희생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빠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내일 행복하자고 오늘을 갈아 넣는 일은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을 전하는 말은 자주 표현하겠다는 각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정말이다. 가슴속 가득 사랑이 들어 있어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상처가 많았던 아빠가 지금은 아빠가 곁에 있는 분에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등을 토닥거리며 다정한 말을 건네신다. 아빠는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 모습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자기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만큼 행복이 커지는 길은 없다. 청각 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이혼을 겪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아빠는 자주 찡그리는 얼굴이셨다. 그런데 자기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분을 만난 후 얼굴에 미소를 되찾으셨다. 자기를 온전히 믿고 위해 주는 사람 옆에서 마음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아빠를 보며 나도 덩달아 행복하다.


사랑하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은 늘 뒤로 미루고 살던 아빠의 짧지 않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려 본다. 쉴 틈 없이 일하고 악착같이 저축하며 빚 한 푼 없이 사셨던 아빠의 치열했던 젊은 날이 아직도 나는 아깝다. 평생 즐길 줄도 모르고 일만 하며 돈 버는 기계처럼 사셨던 아빠의 인생, 그런 아빠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되찾게 되다니 아빠의 늦은 사랑이 반갑기 그지없다. 두 분이 오래도록 다정하게 지내며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이 글을 빌어 강미숙 여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분의 존재가 나에게도 행복임을 수줍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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