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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y 28. 2024

남편은 남의 편


결혼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도 내 눈에는 정확히 보였다. 조금씩 변하고 있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볼 때면 내가 원하던 체중계의 숫자를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가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수련도 하는 거라더니. 강사님의 나긋한 목소리에 맞춰 몸을 쭉쭉 뻗으며 유연한 척 흉내를 내다보면 어느새 긴장도 풀리고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3월이 되어 아이들이 새로운 유치원에 입학을 하고 이사 후 두 달 만에 맞이한 해방이었다. 갑자기 여유로워진 낮시간은 묘한 편안함과 불안함이 있었다. 얼마만의 자유인지 집안일만 하기에는 아까운 마음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요가를 등록했다.


요가가 끝나면 이어서 헬스를 했다. 한 시간 동안 러닝머신을 하고 근력운동까지 마치고 나면 오늘도 해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땀을 쏙 빼고 나서 샤워까지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그 길이 어찌나 상쾌하던지. 아이를 낳은 뒤 처음으로 가져본 운동이라는 취미는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도 수월하게 했다. 어쩌면 외로움을 메꾸려는 듯 매일의 루틴에 더욱 의미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퇴근시간이 빨라졌지만 업무강도는 훨씬 높아졌다. 게다가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스트레스까지 있었다. 남편의 힘든 모습을 보며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이었던 만큼 남편이 이 시기를 잘 견뎌내 주길 바랐다. 


이사를 한 뒤부터는 하루도 빠짐없이 6시 반에 남편의 아침식사를 챙겼다. 저녁식사도 늘 함께 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반찬들로 신경을 썼다. 저녁을 먹고 나면 운동을 하러 가거나 친구를 만나도록 권했다. 여태껏 고생을 많이 해온 남편이었기에 개인시간을 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매일 남편을 그렇게 내보내면 어쩌냐고 걱정의 말을 했지만 그동안 못 놀았던 만큼 이제라도 실컷 즐기해주고 싶었다. 어느샌가 남편은 자기만의 시간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집에서는 티브이를 보는 것 외에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남편을 향한 마음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다. 남편이 운동에서 돌아올 시간쯤에는 늘 아이들을 재우다가 함께 잠이 들어있었고 그러다가 각방 쓰게 됐다. 남편은 자신을 멀리하는 것에 불만을 자주 표현했다. 무뚝뚝한 말투는 여전했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들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꼬일 대로 꼬여있던 우리 사이는 풀지 못할 매듭처럼 엉켜있었다.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낼 수도 없었고 시작 부분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코로나가 터졌다.


아이들과 24시간 함께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당연히 운동도 수 없었다. 갑자기 손과 발이 묶인 기분. 내가 있는 거라곤 하루종일 집에서 아이들의 하루를 책임지는 것뿐이었다. 남편에게는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었다. 그런 걸 기대하고 살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삼스레 바라기도 어려웠다.


집에 있을 때면 방에서 티브이만 보고 있는 남편이 미웠다. 말을 걸었다가는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아 하고 싶은 말꾹꾹 눌러 담았다. 주말이 되어 함께 외출을 할 때도 운전하는 남편의 옆자리가 아닌 뒷좌석에 앉았고 철저하게 아이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 연기 됐다. 학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아이는 새 책가방을 메고 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현관에서 새운동화를 신고 "다녀오겠습니다!"만 수없이 했다. 5월 말쯤 되어 입학을 했지만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는 날들이 더 많았고 친구들과 선생님 대신 EBS방송을 보며 엄마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에게만 집중하던 시간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직장을 다니며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에 관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내가 결정했고 남편이 끼어들 틈을 내주지 않았다. 한집에 살지만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얼굴을 마주 볼일 없는 사이. 그저 아이들을 양육하는 아빠와 엄마. 딱 그 정도 사이였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서 매일이 행복한 것처럼 살고 있는 줄 알겠지.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남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나에게 남은 건 아이들 뿐이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잠잠해 후에도 아이들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내 시간이 주어져도 무얼 해야 할지 멍 하기만 했다. TV조차도 보지 않았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가는 동안 내 안에 무기력도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 사십춘기를 맞이한 너에게 :::
마흔 즈음 찾아왔던 우울증은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었다.  
우연히 읽었던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제는 나로 살기 위한 '꿈'을 꾸고 있다. 지난 나의 이야기, 독서와 글쓰기로 삶이 변화된 이야기들을 천천히 기록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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