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 문학계의 지축을 뒤흔드는 폭죽이 터졌다.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으로.
지인으로부터 온 문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요!”
덩달아 나도 “그러게요! 천지개벽할 기쁜 소식이네!”
아주 드물게, 둘 다 공감한 희소식이다.
한강작가와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문학 문외한인 그가- 스마트폰 바탕화면까지 바꾸었다.
“한국어로 쓴 노벨문학수상 원본 작품, 내 살아생전에 읽어볼 줄이야! ‘소년이 온다, 책 선물로 보내주고 싶은데요?”
“이미 인터넷으로 주문했어요, 따뜻한 맘은 고맙지만.”
한국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리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던 때문일까? 한 마음으로 감동했던 이유가.
그 존재를 몰랐던 한강작가의 경사가 내일인 것처럼, 며칠 동안 들떴다.
각 언론에서 한강과 스미스를 연달아 보도했다.
영국인 번역 작가가 겨우 3년 동안 한국어를 독학했다는 보도 내용, 나의 감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갑자기 쏟아진 하얀 폭설을 뒤집어쓴 들국화처럼, 순식간에 생기를 잃은 나.
그녀보다 더 오랜 7년이나 프랑스에서 불문학 시 전공을 하고도, 제대로 된 번역서 한 권 출판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침잠.
번역 오류의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새가슴으로, 생뚱맞은 낯선 길을 헤매며 잃어버린, 긴 시간의 끝자락에 서있는 나의 자화상!
*
출판사에서 번역 제안받은, 두 권의 영적에세이.
그중에서 성령현존에 관한 책은 우선 접어두었다.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 데다가 긴 문장에도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우선 수도원원장인 사제가 쓴 간결한 문장의 에세이부터 펼쳤다. 술술 읽어졌던 짧은 문장은 예상보다도 어려웠다. 문장의 정확한 번역에 포커스를 두면, 영적 울림이 사라졌다. 반면에 영적 울림에 초점을 둔 번역문장은 누군가가 짜놓은 천을 몰래 가져와, 내 옷을 만들어 입은 몰염치한 도둑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장의 정확성과 영적 울림 사이를 오가며, 번역 저울추를 제대로 지정하지 못한 채로 혼란스러웠다.
출판사에서 반환된 번역본 추신: 한국어로 쓴 프랑스 문장 느낌입니다. 다시 수정해서 보내주세요.
그 지적은 불가사의처럼 이해하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번역에서 욱죄여오는 짙은 불안은 미숙한 곡예사의 줄타기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내면을 꿰뚫는 직관인 씨줄과 낱말의 행렬로 이루어진 문장인 날줄, 그 미묘한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곡예 같았다.
번역의 오류가 맨홀처럼 도처에 숨어있는 것 같은 막연한 불안도!
작가의 숨어있는 의도인 낱말과 서서히 드러내는 실체인 문장, 그 사이에서 늘 조마조마했다. 작가 의도 중점으로 번역하면, 작가의 문장과는 전혀 다른 나만의 새로운 문장이 만들어졌다.
반대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원작자의 심층 메시지가 소멸된 텅 빈 소라껍데기 같았다.
그 어느 쪽도 산뜻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수정할수록, 더 짙은 안갯속에서 헤매는 그런 느낌!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평신도 작가가 성녀로 시성 될 마리 노엘의 고백록은 가장 번역하고 싶었던 책!
너무도 감동받은 나머지, 소그룹 모임에서 영적 친구로 소개했다.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다고 아쉬워하는 – 평소에 나에게 살갑게 구는 - 동석한 지인에게,
“빌려줄게요. 가급적 빨리 읽고, 돌려주세요. 주말에는 번역 중이거든요. 주중에는 직장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요.”
“최대한 빨리 읽고, 반환할게요.”
예상보다도 더 빨리 책을 반환하며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우선 복사만 했어요. 천천히 읽으려고요.”
여러 권의 복사본을 만들어서, 자신이 속한 번역 모임 구성원들에게 분배했다는 첨언은 잊어버렸던 걸까?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공동 작업으로 번역서가 완성됐다며 기쁜 목소리로 통보했다, 나에게!
그 책은 병자성사 사제가 저자의 임종 순간까지 설득한 끝,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온 영적 고백록이다. 오랫동안 사막 같았던 나의 내적인 척박한 영토에 찾아온 아늑한 불빛처럼, 드문 귀한 공감과 따뜻한 위안을 아낌없이 주는 영적 친구 같은 목소리를 내는 책이었다!
결국, 그 책은 초벌 번역만 끝낸 뒤에 중단했다.
완성시킬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소소한 이 사건은 떠오를 때마다, 진한 쓸개즙이 울컥 올라왔다.
충동적인 나는 유쾌하지 못한 사건들을 수시로 만든다. 철없는 꼬맹이 같은 충동은 이성적인 분별력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은 지키지 못한 부주의로 인해, 영혼의 친구를 도둑맞은 상실감이 아주 깊었다. 그 상처의 염증은 번역뿐 아니라 기사도 더 이상 쓰지 않게 되는 긴 후유증을 남겼다. 노트북도 홀로 침묵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오래된 상처 딱지 위에 새겨진, Marie Noël의 Notes intimes에서 발견한 어록,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렇지만 네 울타리도 만들어라.”
(Aime ton voisin, mais plante ta haie.)
누가 내 이웃일까? 내 이웃으로, 그 지인을 받아들인 것은, 나다.
내 울타리를 만들지 않은 책임도, 내 몫이다.
*
얼마 전에 주문했던 한강작가 책이 도착한 날.
첫 페이지를 읽어가던 중, 저절로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겨울 차가운 땅의 무게를 헤집고 나온, 아침 새싹 떡잎처럼 생기를 되찾은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언급한 한강 작품의 ‘시적인 표현’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명료한 문체의 작품을 만난 행운의 스미스에게도 갈채를 보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한강작가의 영혼 깊이를 반영하는 명료한 문체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시적인 문체로 쓴 소설의 신세계에서 받은 그 신선한 충격으로, 번역 실패자의 의기소침했던 우울한 느낌에서도 해방되었다.
그녀들의 놀라운 업적 앞에서, 꼬맹이처럼 온 마음으로 다시 손뼉을 치면서.
*
프랑스친구 아니(Annie)로부터 받은 소포.
박사과정 필수 과목 수강 때에 만난 그녀.
석사 및 박사 과정에서 내가 전공한 19세기 시인의 작품과 논문주제까지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
에밀졸라의 목로주점과 흡사한 카페 2층, 나의 다락방에서 서로의 가족들 캐릭터를 흉내 내며 배꼽 잡고 웃었던 사이다.
쥐방울 드나들듯이 매일 미사 가는 나의 기묘한(?) 일상도 존중해 줄 정도로 사려 깊었던 솔메이트다.
귀국 후부터, 이따금씩 주고받는 편지.
대부분은 그녀의 편지에 답장하는 편이다. 아마도 프랑스어로 편지를 쓸 때 느끼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굼뜬 회신과는 무관하게, 나의 취향으로 엄선한 책과 소소한 선물도 언제나 먼저 충실하게 보낸다. 가끔은 여행지에서 산 특산품 선물도 함께.
그녀가 보내준 선물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품목은, 단연코 책 선물이다.
나의 책 취향과 영적 상태까지 고려해서 선별한 그녀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시집을 필두로 수도자들의 에세이, 성인 고백록 및 금언서, 각종 영적 서적, 말씀 달력과 영적 강해까지 다양하게 보낸다.
그녀가 보내준 귀한 책들은 대부분 읽지 못했거나 번역하다가 중단했다.
전공과는 무관한 직장생활로 인하여, 읽을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던 것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인 그녀.
무분별한 오지랖인 나와는 거리가 먼 냉정하리만큼 객관적이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말들로 내가 울분을 쏟아낼 때에도, 그녀는 무작정 프랑스인을 두둔하지 않는다. 가만히 끝까지 경청한 뒤에는, 나의 분노의 원인을 환기시키는 질문만 하고, 들끓는 나의 부아에도 공감해 주지 않는다. 양쪽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그녀의 객관적 의견은 서운할 때도.
각자의 입장의 다르다는 인식은 관계 갈등해소의 지름길이라며 늘 중립적이었던 그녀.
어느 쪽도 훈수두지 않는 그녀가, 수차례나 나에게 제안했던 글쓰기.
프랑스에서도. 귀국한 후에는 편지로도 제안했다.
어느 날, 그녀 삶에 대한 글을 완성했다는 소식과 함께 글쓰기를 재차 권유했다. 몇 년 동안이나 걸쳐 쓴 자신의 인생여정 고백록 완성 후에,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그 누구에게도 세세히 못했던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심층 밑에 숨겨진 상처들이 치유된 된, 새 마음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는 편지.
추신: 우선 출판할 거라는 생각부터 버려, 화장하지 않으려면. 그냥 떠오르는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서, 느껴지는 숨결 그대로 써봐.
그녀의 편지와 함께 온 선물.
여행지에서 산 것 같은, 작지만 희귀한 원석 목걸이다.
그 포장지를 꽉 여민 작은 빨간 풍뎅이를 보며,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유년시절 장독대 옆에 핀 봉숭아 줄기를 기어 올라가던 똑같은 모습!
그 빨간 풍뎅이만 내가 가졌다, 자연석 목걸이는 조카에게 선물로.
올여름 안양천 아침 산책길에서 재회한 작은 생명체, 야생화 줄기로 기어오르던 빨간 풍뎅이!
너무도 반가웠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시골, 그 예전 소꿉동무처럼.
오늘, 아니(Annie)에게 뒤늦은 답장을 보냈다, 한국 전통 이미지 액자와 함께. 인터넷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었다는 새로운 나의 신원도.
누군가는 가던 길을 되돌아서게 만들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스미스가 한강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면, 친구 아니(Annie)는 나에게?
다혈질인 내가 돌멩이처럼 마구 투척하는 낱말에도, 그녀는 완벽한 프랑스어로 응답했다. 대화 중에 떠오르지 않은 단어에 내가 전전긍긍할 때, 곧바로 합당한 낱말까지 찾아주며 대화를 이어가던 그녀다.
아! 하면, 어!로, 적합하게 응답해 주던 귀한 솔메이트.
Annie가 보낸 선물인 원석 목걸이 포장지를 봉인하고 있던 그 빨간 풍뎅이, 소멸되던 나의 글쟁이 호흡을 되살아나게 만든 실체?
그 빨간 풍뎅이의 숨결로 환생한 글쟁이, 글바트로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