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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 Jun 25. 2024

인조인간 우리 엄마

8화. 코로나19와 싸우다.

 불과 1년 남짓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종식이 선언된 지.


 2020년 1월 국내에서 첫 확진자가 발생하고, 불과 두 달만인 3월에는 국제보건기구(WHO)가 전 세계적인 유행, 즉 팬데믹을 선언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이후 3년 간 전 세계가 그렇게 큰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라는 위기감은 전혀 없었다. 당시 나는 보건복지부 장관의 프로그램 출연을 타진하고 있었다. 그때 담당자에게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3월쯤 돼서 지금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다시 일정 논의하시죠.”

 그만큼 당시 상황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건 3월 11일 WHO의 팬데믹 선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하던 프로그램을 잠시 멈추고 코로나19 특별방송 체제에 들어갔었다. 특별방송은 딱 2주를 예정했었고, 우린 그 정도 되면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걸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특별방송은 두 달을 넘어갔고, 이후에는 특별방송이 아닌 정규방송에서도 반드시 다뤄야 하는 상시방송체제가 되었다.     


 당시 우리가 매일 입에 달고 살았던 말 중 하나는 ‘1호가 될 수 없어!’였다.

프리랜서가 넘쳐나는 방송가에서 팀 내 감염 1호가 된다는 건 몇 개 방송국을 마비시키는 초강력 민폐덩어리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극도로 조심하면서 살았다.

고위험군인 엄마와 함께 살고 있던 나는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팀원들이 모두 한 번씩 감염이 돼도 난 마지막까지 남은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여가 지난 2022년 9월 결국 감염이 되었다.     


 우리 세 식구 중 가장 먼저 증상이 나타난 건 나였다.

열이 나고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자가진단 결과 양성이었다. 병원에 가서 받은 신속항원검사 역시 확진으로 나왔다. 난 방 안에서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동생이 출근하고 난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식사를 챙기고, 도와야 하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는 마스크 두텁게 쓰고 장갑까지 끼고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감염된 지 3일째, 엄마와 동생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음날 확진됐다. 

 “차라리 다 같이 앓고 격리하는 게 생활하기는 더 낫겠다.”

 우린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섣부른 생각이었다.     


 먼저 경험했던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많이 아프지만 3~5일쯤 지나면 견딜 만하다고 했는데 우린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내 경우에는 3일째까지 열이 많이 나고 목이 많이 아프더니 3일쯤 되니 견딜 만해졌다. 이렇게 서서히 괜찮아지나 보다 생각했는데, 5일째부터 다시 심해졌다. 간간이 호흡곤란까지 와서 잠을 자기 힘들 정도였다.

동생은 높은 열이 좀체 떨어지지 않아 고생이었다. 

문제는 엄마였다. 엄마는 수술 후 떨어진 기력이 조금씩 회복돼 가는 상황이었는데, 높은 열과 극심한 인후통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 보니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호흡곤란도 심해졌다. 119를 불러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는데, 하루도 안 돼 수액만 맞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목이 너무 아파 물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감염병 사태 막바지라 국가시스템으로 지원되는 것도 없는 실정이었다.

밤에 엄마 상태가 안 좋아서 긴급 상담전화를 걸면, 꺼져 있거나 안 받았다.

낮에 보건소에 전화해 상담하면 고위험군인 엄마도 서울시내에는 입원할 만한 병원이 없고 경기도 쪽의 요양병원을 알아봐 줄 수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동생과 나는 우리가 쓰러지면 엄마가 큰일 난다는 생각에 억지로 힘을 냈다. 고열과 인후통으로 식사도 힘든 상황이지만, 먹고 토하더라도 조금씩이라도 먹고, 둘 중 컨디션이 조금 나은 사람이 남은 두 사람을 챙겼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남은 사람이 다시 힘을 내고......

그렇게 동생과 나는 일주일을 넘어 열흘 정도 지나서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고, 엄마는 이후로도 한참을 보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동생과 나는 몸무게가 10%가량 빠졌다.

조금씩 얼굴에 살이 붙는 듯했던 엄마는 기력이 완전히 소진돼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고,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당시 엄마는 무릎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수술 전까지 체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엄마는 감염 이전 수준까지는 회복을 하지 못한 채로 수술실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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