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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재원 Jul 10. 2024

크레바스(crevasse)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수개월 째 어둠 없는 시간이 흐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렬하는 태양 아래 빙하가 걸음을 재촉한다. 표면 위 얼음이 조바심을 내어 몸집을 불리고 수면 아래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포도송이에서 알갱이를 하나씩 따 먹을 때마다 드러나는 가지 마냥 지면에 앙상한 균열이 하나 둘 생긴다. 포도 알이 다 떨어져 나갈 때쯤 깊은 윤곽이 얼음판 곳곳에 새겨지고 급기야 줄기 방향으로 두 동강이 나버린다. 심연의 협곡이 우리와 그들을 가로지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골짜기 사이를 곁눈질하는 동안 새파란 바닥이 다시 꿈틀거린다. 얼음 덩어리가 퍼즐 조각이 되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휑한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손에 쥔 네모난 기기로 눈을 돌린다. 햇빛에 반사된 각자의 모습만이 빙판 위에 언뜻 비친다.


 한참을 바라보던 화면이 꺼지고 나서야 하나 둘 고개를 든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연극반 동아리 후배... 낮에는 사무실에서, 저녁에는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눈가에 실핏줄이 터져 있다. 먹먹한 마음에 시선을 돌리니 장판 하나에 의지해 그을음이 진 벽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독거노인의 처연한 눈빛을 마주한다. 반대편 에는 이른 새벽부터 일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중년 남성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아직 꺼지지 않은 기기를 앞에 두고 라이브 방송이 한창이다. 얼음덩어리가 점점 거리를 좁혀가는 중에도 그들은 귀를 막고 자기 논리를 반복 재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다. 쿵!  튕겨져 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 대면서도 마지막까지 서로를 먹잇감으로 겨냥한다. 이에 아랑곳없이 수영복 차림의 커플은 톱니 모양의 얼음 봉우리를 배경으로 셀카와 인스타에 열중한다.


 우리는 각자의 얼음판 위에서 분투하고 있다. 옆 사람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도 무심코 눈길 한 번 줄 뿐 어느새 각개전투를 재개한다. 부디 내가 딛고 있는 판때기가 좀 더 오래 버텨 주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구름에 몸을 숨겼던 태양이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얼음덩어리는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형체를 잃어가고 어느새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다. 비로소 우리는 하나 둘 눈을 들어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만 그 누군가의 처지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40여 년 전 이 땅의 한 청년은 이념이라는 크레바스에 빠져 오랜 시간을 홀로 지새야 했다.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오고도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오늘까지 우리는 진영 간 골짜기를 넘지 못한 채 더 험준한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빈부, 세대, 젠더... 한 발만 잘못 내딛어도 낭떠러지인지라 차라리 쪼개진 얼음 조각 위에서 침묵하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자기만의 독방에 머물러있다. 40년 전 그는 햇살이 좋은 낮에는 창살 밖의 풍경을 그리며, 추운 밤에는 같이 수감된 자들과 부대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무수한 나날을 견뎠다. 우리는 언제든 이 방에서 나갈 수 있음에도 서로를 비난하거나 체념한 채 방 한 구석에서 홀로 추위에 떨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각자도생의 과업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것을. 서로에게 연민의 손길을 내밀고 협곡과 협곡 사이에 연대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비록 한 줌 흙으로 물속에 흩뿌려지는 게 우리 모두의 종착지일지라도 같은 땅 위에 발 딛고 서로의 상처를 기꺼이 껴안을 때 비로소 안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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