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읽고...
새하얀 가루가 아이보리색 도마 위에 흩어져있다. 내려놓은 칼을 집어 들고 다시 한번 조심스레 동그란 그것을 응시한다. 딱. 하루이틀 해 본 일도 아닌데 반으로 자르는 게 쉽지 않다. 칠 대 삼... 어떤 걸 먹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 좀 더 큰 조각을 이내 삼킨다. 마음 같아선 한 움큼 털어 넣고 싶지만 혹여나 싶어 뚜껑을 좀 더 조여 잠근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라디오 주파수 마냥 널뛰던 마음이 진폭을 줄여가는 대신 그만큼 의식은 또렷해진다. 한 알을 다 먹었어야 하나.. 애써 잠을 청하는 게 부질없음을 알기에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복기해 본다.
매번 반복되는 실랑이 끝에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암막 커튼을 친 채 그대로 쓰러진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숙면을 취하는 시간. 언젠가부터 아침은 나에게 오후를 대비해 전열을 정비하는 시간이 되었다. 후드득 커튼을 뚫고 들리는 소리에 조금씩 눈을 떴다 다시 감는다. 빗소리에 취해 영원히 잠들고 싶다... 가 끝내 우산을 두고 뛰쳐나간 큰 애가 떠올라서 흐물흐물 몸을 일으킨다. 오후 두 시. 다행히 아직 하교 전이다. 우산을 챙겨서 가는 길에 쓰러져 있는 자전거 한 대를 곁눈질한다. 자물쇠는 어김없이 손잡이에 덩그러니 걸린 채. 옅은 한숨을 쉬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우산을 쓴 무리 중에서 캡모자를 쓴 커다란 물체 하나가 다가온다.
"어? 우산 가져왔어? 땡큐 ㅎㅎ"
"너 자전거는 어디다 뒀어?"
"저기 있어."
"자물쇠는?"
"우리 동넨 자전거 잘 안 훔쳐... 앗!
히죽히죽 웃던 그는 등짝 스매싱을 맞고 기껏 가져온 우산을 내팽개친 채 씩씩 거리며 돌아선다. 바람에 뒤집힌 우산과 장대비 사이로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몰고 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교차한다.
"엄마!"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며 교문을 나서던 둘째가 나를 발견하고 뛰어온다.
"나 머리 아파."
조금 전까지 밝게 웃던 아이 표정이 바뀌었다.
"집에 가서 좀 쉬자."
"학원 숙제 해야 돼."
"좀 쉬었다 하면 되잖아."
"그럴 시간 없어."
"그럼 오늘 학원은 하루 쉬자."
"안돼. 가야 돼."
"그럼 좀 쉬었다 가."
"숙제 못했다고!"
아차, 또다시 무한루프에 빠져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문 채 집으로 향하는 중에 아이는 끊임없이 두통과 숙제, 학원 이야기를 폭우를 뚫고 쏟아낸다.
집에 갈 때까지만 참자... 가까스로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데 아래층 이웃 아주머니를 만난다.
"안녕하세요?"
고개 숙여 공손히 인사하는 딸아이에게 아주머니가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어떻게 애를 이렇게 잘 키우셨어요."
폭풍 칭찬이 이어지는 중에 일그러지는 표정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대화가 길어지고 축축해진 양말 속에서 발가락만 연신 꼼지락거린다.
"애를 낳지 말았어야 했어."
"무슨 일 있어? @@"
(그걸 몰라서 묻냐.')
"윤이가 또 짜증 냈구나?"
(알면 와서 어떻게 좀 해봐.')
"걔가 내 판박이라서 그래. 시간 지나면 나아질 거야."
(얼마나 더?)
"나도 마흔 넘으니까 좀 나아졌잖아 ^^;"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때 되면 뼛가루 되어 있을 텐데.')
하릴없이 카톡 창을 바라보다 이내 돌아눕는다. 좀 있으면 막내가 돌아올 시간이다. 잠시라도 쉼이 필요하...
새벽 다섯 시.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을 마주한다. 표정 없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십 년 가까운 교직 생활, 그리고 그만큼의 시간을 세 아이와 부대껴 지냈다. 내가 선택한 직업과 결혼, 그리고 육아였기에 잘하고 싶었고 그 책임감이 하루하루를 버티는 동력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삐그덕 거린다. 아이와의 말다툼은 쉽사리 임계치를 넘어서고 학원 선생님한테 걸려온 상담 전화는 부재중 모드로 전환한 지 오래다. 아이들이 동시에 "엄마!"를 부를 때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픈 마음뿐이다.
후드득 한동안 잠잠하던 빗소리가 귓가를 다시 때린다. 빗물이 고인 베란다 바닥을 행주로 덮고 거실 창문을 닫는다. 유리창을 흐르는 빗줄기가 어느새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린다. 눈가를 훔치며 침실로 돌아서는데 거실 한 구석에 검은색 케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먼지를 털어내고 살며시 입을 대 본다. 후 후 막힌 소리가 난다. 이것마저 내 뜻대로 안 되네... 여러 차례 입모양을 바꿔가며 불어 본다. 빗소리는 잦아들고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속삭이듯 스며들어 발치에 와닿는다.
*이 글은 아내의 허락을 구하고 그녀의 시점에서 쓴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