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 중 괴테의 <파우스트> 편을 읽고...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까요? 당신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고 은근히 자부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여전히 아득하게 당신을 찾아 헤매는 제 모습에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20여 년 전 영국 남부 해안가 작은 마을에서의 일상을 하나하나 더듬어 봅니다. 빽빽이 들어찬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를 지나 황량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돌아오는 길에 예배당에서 들리는 성가에 이끌려 주체하지 못하고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게 됩니다. 부다페스트 광장에서 마임과 전도를 하고 카파도키아 동굴에서 당신께 드린 기도 또한 기억합니다.
무엇 때문에 저는 그토록 간절하게 당신께 매달렸던 걸까요? 적어도 당신과 함께 하는 동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제 안의 불안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배회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무릎 꿇고 기도와 찬양을 드릴 때 당신이 말씀하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온전히 느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려 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 믿음이 뒤틀린 탓일까요? 오랜 시간을 불안과 강박에 붙들려 살면서도 당신께서 이런 저를 자유롭게 해 주시리라 확신을 갖고 버텼습니다. 간절히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제 모습에 낙담하고 종국에는 당신을 저주하기까지 이르고 말았지만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도다."(시편 51장 5절)
왜 굳이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인간을 태생부터 죄인으로 만드셨나요?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저희를 구원함으로 홀로 영광 받기를 원하셨나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좀 치사하지 않나요?
돌이켜보면 제가 죄의 문제에 천착했던 것도 저를 괴롭힌 강박과 무관치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내 안의 불완전함을 주시하고 토해내면서 스스로를 잡아먹는 괴물이 돼 버린 거죠. 한 때는 제 뒤에 끈덕지게 붙어 있던 강박이라는 녀석이 사도 바울이 말한 몸의 가시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12장 7절)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 곳곳을 순례하면서 그가 스스로를 해치면서까지 바라던 게 무엇인 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저를 괴롭히는 증상이 강박이라는 것도, 강박이 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던 시절이었지요. 지난한 여정 끝에 결국 그는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디모데후서 4장 7절)
선한 싸움이라니요… 저는 찰나와 같은 제 인생을 전쟁터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시간을 건너 선물로 약속된 왕관을 채 써 보기도 전에 그 무게에 짓눌려 현기증이 나더군요. 언젠가부터 저는... 당신 없는 세상을 슬며시 꿈꿨습니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많은 시간을 걸었고 또 그래야 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걸 경계했지만 때론 그런 과정 또한 필요하더군요. 자책과 반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를 보노라니 문득 그가 애처롭게 느껴졌습니다. 그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그의 내밀한 어둠까지도 품어야 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그토록 떼어 내고 싶었던 걸 기꺼이 받아들이니 거짓말처럼 힘을 잃더군요. 처절하게 자유롭기를 갈구할 때에는 꿈쩍 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저를 구원한 건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아니라 꾸준한 약 복용과 일기쓰기, 그리고 제가 살아갈 근거가 돼 주었던 가족 덕분이었습니다. 이 또한 당신의 커다란 계획의 일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치워 버렸습니다. 더 이상은 가늠조차 안 되는 당신의 뜻으로 제 머리 속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거든요.
당신과 상관없는 인생을 소망합니다. 내 욕망과 의지에 귀 기울여 나다움을 찾는 삶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 여정에 시행착오와 희로애락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온몸으로 부딪치며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언젠가 지옥의 불 구덩이 같은 당신의 징계가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진 않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요. 적어도 이번 생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오늘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접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여 나의 하루를 만들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