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여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쿰쿰한 냄새가 배어 나온다. 켜켜이 내려진 암막 블라인드를 실타래 풀듯 하나하나 올린다. 책상 위를 빼곡히 채운 식별할 수 없는 암호, 힘 없이 의자에 축 눌어붙은 수건, 도끼로 여러 차례 찍은 듯한 바닥과 그 위에 흩뿌려진 수박씨까지... 도처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쿵 쿵 쿵 그가 돌아올 시간이다. 삐 삐 삐리리 현관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냉장고 문이 열린다. 수박 상자와 노트북을 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만의 보금자리로 직행한다. 비록 몇 초의 찰나이지만 거실에서 그를 멀뚱 멍뚱 쳐다보던 이들은 순삭 당한다. "손부터 씻어!" 뒤늦은 외침은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2년여 전 오미크론의 습격을 피하지 못하고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 틈을 타서 그와 함께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스크를 벗고 좀 더 넓은 세상과 호흡하고 해주고 싶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다녀오는 버스 안에서 그는 타워브리지가 열리는 걸 보고 싶어 했다. 꽉 막힌 차량 행렬을 뒤로하고 버스에서 내려 뛰기 시작했다. 땀에 절은 손을 꼭 쥔 채 좁은 골목과 템즈강변을 정신없이 달렸건만 해는 이미 저물었다. 쫑알쫑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무용담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마음이 길을 잃을 때는 그날 저녁을 추억하며 추스르곤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반추가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걸 알지만 자꾸만 뒤척이게 된다. 불현듯 제주도 일년살이 중 비좁은 방에서 그와 씨름을 벌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코로나를 피해 섬으로 왔건만 학업에 손을 뗄 수는 없었다. 주변 학원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고민하던 중 내가 직접 영어를 가르쳐 보겠노라 결심했다. 카투사 시절 전장에서 익힌 생존 영어를 하나하나 전수하려 했건만 그의 눈빛은 패잔병 마냥 풀어져 있었다. 분노 데시벨이 상승하고 버럭 하는 소리와 등짝 스매싱... 그 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헛헛함까지 똑같은 레퍼토리가 되풀이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폼을 잡고 한 마디 할라 치면 그는 가자미눈을 뜨고 등부터 보였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눈웃음은 살덩이에 파묻혀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듯 멈추지 않던 수다는 밥 뭐야, 나가, 등 긁어줘 서너 마디로 간소화되었다. 무엇보다 버럭의 주도권이 그에게로 넘어가면서 최소한의 통제력마저 상실했다. 저녁마다 자전거를 타고 함께 안양천을 누비던, 퇴근이 늦은 날이면 자지 않고 기다리다 짠 하고 나타나며 내 품에 안기던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도저히 즐길 수 없고 당근마켓에 내놔도 팔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든 그의 넓은 등짝을 바라보며 번민의 밤을 새웠다. 전열을 정비해야 했다. 그의 일상은 베테랑 교사인 그녀가 전담하고 그 대신 내가 둘째와 꼬맹이를 맡기로 했다. 교직 현장에서 각양각색 군상을 겪어본 그녀의 내공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지만...
기대가 체념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어느 안온한 주말 오후 여느 때처럼 게임 시간을 두고 그와 그녀가 지난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쿵 쿵 쿵 공룡 발자국 소리에 그녀의 훈계 짹짹 참새 소리가 되어 튕겨져 나왔다. 둘째는 분수 개념이 이해가 안 된다고 괴성을 지르며 그녀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처세에 밝은 꼬맹이만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영어 단어장을 펼치고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그녀가 혼돈의 세계로 끌어 들어가는 동안 나는...
독서모임에 참석해 멤버들과 교양 있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SOS 호출을 받고 현장에 돌아왔 때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묘한 안도감을 숨기고 한걸음 한걸음 혹 지뢰가 남아 있지 않을까 까치발을 들고 현장을 점검했다. 그와 둘째는 방콕 중이고 거실에는 꼬맹이만 홀로 넘버블럭스를 시청하며 유유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꼬맹이가 가리키는 대로 살며시 안방 문을 열었다. 헝클어진 머리의 그녀가 대자로 엎드려 있다.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본다. 꿈틀 아직 살아있다. 좀비가 된 그녀에게 되지도 않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곱씹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방안이 필요했다.
누구나 마음의 온도계가 적도와 극지방을 제멋대로 널 뛰는 그런 시절이 있다. 가물한 기억이지만 내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을 터 그를 이해해 보려고 했으나 당최 마음과 머리 둘 다 꿈쩍이지 않는다. 그녀와 숙의한 끝에 내린 결론은 '내려놓기'.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기준선을 지우고 속에 열불이 나면 사그라질 때까지 안양천 숲길을 걷고 또 걷는다. 마음 챙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비로소 휴전 모드로 전환 중이다.
늦은 저녁 현관문 앞에 택배가 하나 와 있다. <아들의 사춘기가 두려운 엄마들에게> 그녀가 주문한 모양이다. 심란한 마음에 유튜브 창을 연다. 자녀와 대화하기, 살 빼는 식단, 화를 다스리는 법... 리모컨에 대고 되는 대로 중얼거린다. 너무 많은 조언들 사이에서 허우적대니 피로가 몰려온다. 잠이나 자자 침대에 누우려는데 이불을 뒤집어쓴 거대한 물체가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꿈쩍하지 않는다. 별 수 없이 베개만 간신히 빼서 건너편 그의 방으로 향한다. 굳게 닫힌 창문을 열고 침대 위에 널브러진 만화책을 구석으로 밀어 놓는다. 조금씩 옅어지는 그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시고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