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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꽃 Nov 27. 2024

폭설이라는 거대한 감옥

강원도의 첫눈


새벽부터 눈이 많이 와서 잠을 못 잤다.
눈이 온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눈이 얼마나 쌓이나 보려고 시간마다 일어나서 바깥을 봤다.
소리도 없이 바깥엔 온통 하얀 눈들이 쌓이고 있었다.
어제의 설렘과는 다르게 차들의 색조차 알아볼 수 없게 눈이 쌓이기 시작하고 길이 온통 눈으로 뒤덮이자 눈은 곧, 공포로 다가왔다.
'강원도의 겨울'이라는 거대한 감옥은 엄청난 폭설이라는 존재감으로 막을 열기 시작했다.





아직 어두운 시각, 아침 여섯시부터 남편은 정해진 구역에 제설을 하러 가야 한다고 나갈 채비를 했다.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남편 도시락과 간식들을 챙겨주고 걱정스럽게 바깥을 보는데 밑에 층의 젊은 청년이 차의 눈을 쓸어내고, 공용현관의 눈을 쓸고 있었다.
아직 깜깜한데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하며 주섬주섬 목도리를 하고 패딩을 꺼내 입은 뒤
일곱시쯤엔 남편과 같이 따라나가서 남편 차와 내 차의 눈부터 치웠다.
남편은 빨리 가야 한다며 앞뒤의 눈들만 쓸어내고 거대한 눈을 천장에 매단 채로 출근을 했다.
멀어지는 남편의 차에 잠깐 손을 흔들고, 눈 삽과 빗자루를 들고 다시 주차장으로 나왔다.
입구의 눈은 밑에 층 청년이 치워놔서 나는 집 앞에 차들이 나갈 길을 눈삽으로 퍼냈다.
여덟시가 넘으니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서 다른 구간들의 눈도 치웠다.
가족들은 나오지 않고 출근 전에 다들 나와서 눈을 치우고 가는 듯했다.
사람이 많아지자 일어난 채로 외투만 입고 돌아다니던 나는 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에 그제야 집으로 들어왔다.



차에 눈을 치우는 사람들은 길쭉하게 생긴 다양한 제설 도구들로 수북이 쌓인 눈들을 치웠다.
나는 당장에 있는 게 없어서 차에 있던 성에 긁는 도구로 높게 쌓인 눈을 치우느라 한참을 애를 먹었는데,
멋진 제설도구들로 순식간에 눈을 치우는 사람들을 보니 부러웠다.
그래서 곧장 집에 들어와 차량용 제설도구들부터 주문했다.
제설도 장비빨이 있구나- 처음 생각이 들었다.  
여덟시 반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출석체크를 했다.
뒤늦게 남편에게 사람들이 자기 호수를 얘기하더라- 얘기하니까 관사 특성상 제설할 때마다 호수별로 출석체크를 한다고 한다.



이제 와서 달려나가 아까 눈을 치웠다고 출석체크를 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나가진 않았다.
어떤 불이익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출석체크를 하는 줄도 몰랐던 나는,
 여덟시 전에 사람들이 나오기도 전에 눈을 치우고 왔는데 조금 억울했다.
이제부터 눈이 올 때마다 출석체크를 위해 여덟시부턴 나가있어야겠구나 생각했다.



열시가 넘은 시간에는 집에 혼자 있으니 갑갑한 마음에 나가고 싶어져서 창문을 열어 운전할 수 있을지 수시로 봤다.
눈이 치워지고 나니 운전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나가서 걸어보다가 그만 꽁꽁 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저앉으며 손으로 바닥을 짚어 손이 다 까졌다.
피는 나는데 다시 일어나려고 해도 바닥이 미끄러워 헛발질을 하며 또다시 주저앉았다.
그쯤 되자 서러운 마음에 그냥 그 자리에서 울었다.
낯선곳에 살며 부축해 줄 사람도 없이 넘어지면 혼자 일어나는 게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문득 이 순간에 물밀듯 슬픔과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냥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다양한 복합된 감정으로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강원도의 추위는 울지도 말라는 듯 곧이어 눈물도 얼게 했다.
당장에 눈물 범벅인 볼과 귀도 얼어붙을 듯 너무 시려웠고, 내 주변엔 사람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그 자리에 앉아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울든 말든 어차피 적막한 이곳엔 내 울음소리를 들을 사람조차 없었다.

대충 얼굴을 닦아내고 절뚝거리며 집에 돌아와 주섬주섬 약통의 드레싱 키트를 꺼내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둘렀다.
병원 하나 없는 곳에 살면서, 그래도 내가 간호사여서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인 건가 싶었다.



겨울이 오기전에 이곳 저곳을 여행다니며 겨울동안 간직할 좋은 기억도 충분히 많이 만들었고
이젠 겨울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첫눈이 몰고온 폭설은 날 집어삼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폭설이라는 이 거대한 감옥 안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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