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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꽃 Nov 28. 2024

폭설이 지난 뒤 남은 것들

봄을 기다리며

한동안 추위와 이틀간 이어진 폭설로 며칠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어제 잠깐 집 앞에 나갔다가 빙판길에 어져 다친 이후로는 나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었다.
일 년을 살았어도 내겐 낯선 타지일 뿐인 화천.
어차피 나가봐야 이곳에선 갈 곳도, 만날 사람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
오늘도 눈 소식은 있었지만 생각보다 눈이 많이 오지 않아 낮 동안에는 모처럼 동네 산책을 다녀왔다.
여전한 빙판길이 두렵긴 했지만 문득 '늘 보러 다니던 동네 강아지들이 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어제도 눈을 치웠지만 하루 새에 차를 덮어 수북이 쌓인 눈들을 치워내고 늘 강아지를 보러 가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추운 날씨에도 눈밭 위에 그대로 누워있기에 차 문을 내리고 부르니 금세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주차를 하고 내리려던 순간에도 저렇게 앉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그 순간 그간의 모든 근심이 녹아내렸다.
외로운 시골 생활을 하며 이곳의 강아지들은 내게 친구이자,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도 날 반기지 않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날 반겨주는 존재.
늘 한 바퀴 크게 빙그르르 돌고 내게로 온다.
잘 있었냐, 춥진 않냐, 말을 건네며 가만히 쓰다듬었다.
오늘도 강아지는 참 해맑았고 그 모습을 보는 나도 한참을 앉아 웃었다.
웃는데 코끝이 시큰해지며 자꾸만 눈물이 났다.
포근한 털을 만지며 그래도 이곳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말을 건넸다.
내 마음을 아는 듯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강아지는 또다시 한 바퀴 돌아 해맑은 얼굴로 내게 뛰어왔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나는 처음 봤을 때 이 강아지의 텅 빈 눈을, 점점 밝아지던 모습들을 기억한다.
이곳에서의 내 모습과 닮아있던 모습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늘 혼자 있는 나도 이 강아지를 보러 나올 때만 잠시 웃곤 한다.



영하의 날씨에 추위도 잊은 채 한참을 강아지와 시간을 보내고,
이참에 늘 보러 가는 토실이가 있는 곳도 가기로 마음먹었다.
토실이가 있는 곳은 이곳보다도 더 시골이라서, 나는 체육공원에 차를 세워두고 삼십 분을 걸어갔다.
아직 제설이 되어있지 않아 곳곳의 식물들이 눈에 파묻혀있었다.
눈이 많이 온 이곳은 시선이 닿는 곳 모두가 '설국' 그 자체였다.



시골길에 이미 누군가 다닌 흔적도 있었다.
차들이 다닌 것 같은 길들은 너무 미끄러운 빙판길이어서
나는 눈이 쌓인 곳으로 걸으며 언 눈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얼어버린 눈과 얼음이 바스러지며 걸을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걷다 보면 마주치는 설산.
눈으로 뒤덮인 산들이 구름이 움직일 때마다 같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눈에 파묻혀 평소엔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산맥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비록 폭설은 이곳에 생기를 앗아갔지만 이때에만 마주치는 장관은 따로 있었다.
쌓인 눈을 바라보며 곧 다시 피어날 봄날을 기다렸다.
저 산이 다시 초록빛으로 물들 날이 머지않길 바랐다.



한참 걸었다 싶을 때쯤 저 멀리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부터 나를 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기에 나도 눈길에 넘어지지 않게 종종거리며 달려갔다.
평소처럼 빙그르르 돌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 움직임이 평소보다 위축되어 있었다.
추위에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앞으로 겨울은 길 텐데, 이제 시작일 뿐인데.
너도 이 겨울이 힘들구나- 안타까운 마음에 그저 쓰다듬었다.



조금 더 걸어 꽁꽁 얼어있는 이곳의 집들과 여름에는 사람들이 피서를 오곤 하던 곳들을 둘러봤다.
여행객들로 북적이던 평상 위에는 눈만 소복이 앉아있었고,
근방엔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름 내내 보던 풍경이 꿈인가 싶을 정도의 적막이었다.


사람들이 여름 내내 다슬기를 잡기도 하고
물놀이를 하기도 하던 캠핑장 옆의 강에도 이제 오리들만 남아있다.
오리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강을 돌아다니며 가끔 물속에 머리를 숙여 먹이를 찾고 있었다.


종종 걷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만들어놓은 눈사람도 발견할 수 있다.
돌과 풀로 머리, 얼굴을 만들어 놓은 모양새를 보니 웃음이 났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흔적으로 나도 잠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비록 지금도 간간이 눈은 오고 있고
추운 날씨에 내렸던 눈도 녹지 않고 여전하다.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여전히, 나를 살게 하는 작은 순간들은 내 곁에 있다.
조금 더 지나고 나면 봄이 올 테니 조금만 더 버티자.
지겹도록 길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도 언젠가 끝이 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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