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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자 Apr 29. 2024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오늘 저녁은 왠지 바쁠 것 같았다.


 원래 화요일은 바쁜 요일이 아니었는데 화요일마다 참여하는 글쓰기 모임에 가입하고부터는 화요일이 조금 타이트해졌다. 또 화요일은 이제 막 자취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동생이 저녁을 준비하기로 한 날인데 어제 미처 장을 보지 못해 놓아서 동생이 간단히 조리할 수 있는 저녁거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날에 테니스 연습을 하고 녹초가 되는 바람에 월요일마다 동생과 함께 하고 있는 저녁 산책을 내일로 미루기로 했던 일도 생각났다. 할 건 많고 시간은 빠듯하네. 어떡할까? 동생이 점점 토실토실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운동하는 겸 하고 있는 산책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을 불러서 옷 갈아입고 바로 나가자고 하고서, 나도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막 나서려는 순간,


 "뭐야. 너 잠바에 뭐가 이렇게 묻었어?"

 "그게⋯ 점심에 감자탕 먹다가 국물 조금 흘렸어."


 점심으로 뼈해장국 사 먹었다고 했지. 대충 훑어봐도 조금 흘린 건 아니었다. 잠바 앞부분이 다 얼굴덜룩해졌는데? 이 정도면 쏟은 거 아니야? 그런데 다시 보니 동생이 입은 이 회색 잠바는 오늘 처음 보는 옷이다.


 "너 이 옷은 어디서 났어?"

 "이거 엄마가 어제 사 준거야."


 산지 하루된 옷이라니, 야단 났다. 왼쪽 가슴 부분에 보이는 브랜드 마크부터 슬쩍 확인했다. 디스커버리? 옷에 문외한인 난 잘 모르는 브랜드지만 싸구려는 아닐 것 같은데⋯⋯.


 에라, 일단 모르겠고 산책이나 하고서 나중에 생각하자.


 "그걸 입고 어떻게 나가. 일단 잠바는 여기에 걸어놓고 다른 거 입고 와."






 저녁노을이 반기는 중랑천의 산책길은 너무 평화로워서, 감자탕으로 얼룩덜룩해진 잠바의 존재는 금세 잊고 말았다. 졸졸졸 흐르는 하천길을 따라 이어지는 녹색으로 가득한 풍경들. 와, 좋다! 이어폰을 귀에 꽂아놓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발곡역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턴. 회룡역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서, 다시 망월사역까지 돌아오면 얼추 한 시간짜리 코스를 완주하는 셈이다.


 갑자기 노래가 끊기더니 벨소리가 울렸다. 엄마 전화다.


 "성태 잠바가 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니?"


 그새 동생이 엄마한테 연락했나 보다.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역시나, 한숨부터 푹 쉬는 엄마.


 "아니 그게 얼마짜린데, 아이고 속상해. 어떡하니?"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어떡하니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조심스럽게 엄마의 반응을 살피다가 기회를 봐서 하고 싶었던 말을 슬쩍 꺼냈다.


 "엄마 이거 세탁기 돌려도 돼?"

 "응? 세탁기는 무슨 세탁기? 그거 비싼 거야!"


 이크,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원치 않았던 반응이 나왔다. 이어지는 엄마의 목소리.


 "옷 밑 부분에 세탁 표시는 봤어?"

 "봤지."

 "뭐라고 쓰여있는데?"

 "손세탁. 30도. 중성."

 "그러면 당연히 손세탁해야지. 으휴."

 "알았어."


 최대한 항변을 해봤지만 결국 짐작한 대로 내가 손세탁을 하게 생겼구나.


 "아들. 이거 최대한 빨리 해야 해. 늦으면 늦을수록 이런 얼룩은 안 지워져. 지금 바로 해줘!"


 지금은 한창 산책 중인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골치 아픈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동생과 산책을 즐기는데 우선 집중했다. 발걸음이 조금은 빨진 것 같기도 지만.


 정신이 없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어떡하지? 식비도 아끼고 건강도 챙 겸 웬만하면 집밥을 해 먹고 싶은 나였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야. 피자 먹을까?"

 "피자 좋아!"


 냉큼 대답하는 동생. 갑자기 손빨래를 해야 하는 얼룩 잠바가 생각이 나 동생에게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동생과 피잣집으로 향했다. 마침 화요일은 도미노피자에서 40% 포장 할인을 하는 요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져 콜라까지 주문하고서 카드를 내미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들, 했어?"

 "나 아직 밖인데."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는 주문한 피자를 받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이런, 피자는 다 먹고서 손빨래를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동생 보고 대충 식탁에 세팅을 해놓으라고 하고서는 얼룩덜룩한 잠바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잠바를 던져 넣고, 물을 틀고, 오래전 사두었던 애경 울샴푸 세제를 찾아서 뿌리고, 뽀드득뽀드득 비벼본다.  


 첨벙첨벙. 세면대 위로 넘치는 물이 발등 위로 튀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대야를 하나 사둘 걸 그랬다. 그런데 뽀드득뽀드득, 이거 뽀드득, 아무리 비벼도 안 지워지는데? 한참을 실랑이해 보다가 결국 전화.


 "엄마. 이거 아무리 빨아도 안 빠지는데."

 "아이고 세상에, 잘 좀 해봐."

 "아무리 해도 안 된다니깐?"


 잠시 동안 서로 물러서지 않은 채 동일한 입장 표명이 반복되었다. 안 된다. 다시 해봐. 안 되는데. 그래도 또 해봐. 내가 기회를 틈타 타협안을 제시해 봤다.


 "그러지 말고 엄마, 세탁기 강력으로 해서 한 번만 돌려보면 안 돼? 중성 말고 염기성 세제 써서 해볼게. 그럼 지워질 수도 있잖아."

 "아이고야⋯⋯."


 힘 빠진 엄마의 반응이 이미 반쯤은 포기하신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혹시 모른다는 약간의 희망을 품은 채로 얼룩 잠바를 세탁기에 넣었다. 염기성 세제에다 강력 세탁이라면 또 모르지 않을까?


 사실 솔직히 말하면 얼른 도미노피자를 먹고 싶었다.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에, 세탁기에서 꺼낸 얼룩 잠바는 아쉽게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뒤늦게 동네 세탁소로 뛰어갔더니, 아니 이걸 세탁기를 돌리면 어쩌냐고 글쎄, 얼룩이 묻자마자 트리오를 흠뻑 묻혀서 빡빡 밀어야 된다고⋯⋯.


 그래도 시도는 해보겠다며 잠바를 가져가신다. 금요일에 다시 오라고 하신다. 이런, 전화가 또 울린다.


 "내가 뭐랬니! 그러게 손으로 좀 더 해보라니까.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아이고 큰일 났다. 금요일만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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