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생일이다. 어떤 기대도 없이 생일을 맞았지만 아침을 미역국 대신 누룽지로 때웠을 때는 조금 씁쓸했다. 나를 위해 미역국 끓이는 것도 귀찮았고, 가족 중 누군가 미역국을 끓여준대도 마다하고 싶었다.
정작 그런 일은 없었다. 일본에 갔다가 어젯밤 늦게 도착한 딸은 아침 일찍 출근하기 바빠 얼굴도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고, 남편은 비가 오는 바람에 차질이 생긴 일정을 어떻게 대체해야 할지 고심하는 듯했고, 아들은 꼭 닫힌 방문 안에서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들 속에서 내 생일을 챙겨야 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서운한 생각은 그보다 더한 생각에 압도되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아들이 설거지를 했다. 아침에 잠긴 방문 앞에서 설거지를 해주면 고맙겠다고 몇 번이나 부탁을 하고 출근을 했다. 아들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래놓고도 설거지를 했을 거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역시나 퇴근하고 집에 갔을 땐 설거지는커녕 삼겹살을 구워 먹은 흔적조차 치우지 않은 채였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쭈뼛거리며 제 방으로 숨어 들어가려는 아들을 붙잡고 오두방정을 떨다시피 했다. 아들 기분을 살피며 어떻게든 아들 마음에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답을 어떤 반응으로든 받고 싶었다.
하루종일 법륜스님의 영상을 봤다. 스님은 자식의 현재는 부모 영향이 크고, 특히 엄마 영향이 크다고 했다. 그 말에 반박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듣다 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란 생각으로 하루종일 지난 내 행동들을 후회하고 자책했다. 정말이지 깨달음이 온 것처럼 내 행동의 잘못 하나까지도 선명히 느껴졌다. 그런 깨달음과 아들의 반응을 얻고 싶은 마음이 더해져 오늘따라 유난히 호들갑스럽게 굴었다. 아들을 안고 미안하다고,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 우리 함께 노력해 보자고, 온갖 희망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방으로 쭈뼛거리며 숨어들려던 아들이 거실로 순순히 따라 나왔다. 그런 상태라면 아들에게 뭐라도 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를 위해서 설거지를 해주면 고맙겠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다렸다. 아들이 과연 설거지를 할지 말지 오로지 그것만 신경 쓰였다.
십 분쯤 후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다 씻겨주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가서 아들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부엌으로 갔다. 고무장갑을 낀 아들이 나를 보고 웃었다. 무슨 일을 해놓고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 아이의 모습 같았다. 아들은 아직은 다 된 게 아니니 나오지 말라는 듯 제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냉동실에서 꺼낸 주꾸미를 해동하기 위해 방에서 나온 것처럼 전자레인지에 얼린 주꾸미를 돌렸다. 세제를 묻힌 그릇들이 싱크대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런 그릇조차 희망적으로 보였다. 해동된 주꾸미를 전자레인지에서 꺼내놓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구나 안심이 됐다. 방으로 들어와서도 잠시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10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싶었다.
다시 부엌에 나갔을 때는 정말 완벽하리만치 정돈된 설거지가 끝나 있었다. 예전의 아들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하다고 아들을 안고 또 안았다. 사온 시금치를 데치고 주꾸미볶음을 하는 동안 아들은 티브이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발 좋은 생각만 하기를,
오늘의 일로 용기를 내보기를 요리를 하는 내내 기도처럼 읇조렸다.
허겁지겁 상을 차렸고 아들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늘 아들의 기분을 살피는 게 습관이 돼버린 나는, 내 무의식은 불편함을 숨긴 기쁨, 행복함을 가장한 편안함으로 건너편 의자에 앉아 급하게 식사를 했다. 나로선 편한 마음으로 아들과 식사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걸 숨기기 위해 더한 배려가 필요했다. 접시를 가져다주고 주꾸미볶음을 덜어주고.. 아들이 별미라는 말을 했다.
갑자기 아들이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불편하게 하는 어떤 감정이 번개처럼 아들을 관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식탁을 벗어나 거실을 가로질러 제 방으로 가려는 아들을 말로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또 시작됐구나 하는 생각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아들은 아주 잠깐 거실에 서서 망설이는 듯하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오늘도 아들을 대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식사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아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식사하면서 어떤 지점에서 번개가 일었는지를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삼겹살 조각을 아들 밥그릇에 올려준 거? 밥을 더 먹으라고 남은 밥을 전해준거? 아니면 아들과 함께 하는 식사가 불편해서 나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었던 거? 아들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무엇이 아들 기분을 상하게 한 걸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숨이 막혔다. 그래도 나는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들 행동에 동요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태연한 척하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런 순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밥을 다 먹고 내 그릇만 치웠다. '혹시나' 하는 일은 일어난 적이 거의 없지만 아들이 다시 나와서 밥을 먹을까 싶어 밥상은 그대로 두었다. 아들 방문 앞으로 갔다. 엄마인 나는 언제나 아들을 힘들게 하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가해자라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 내 잘못이야.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 말 좀 해줘. 그래야 고칠 수 있잖아. 네가 말 안 하면 엄마도 고칠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무엇을 고쳐야 할까. 어떤 엄마가 되어야 과거의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닫힌 문 앞에서 아픈 아들에게 나는 어떤 대접을 받아도 당연한 사람인 양 웃고 있다.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상황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어린아이와 하는 장난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