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호랑이와 고라니
동네 고양이들을 재건축 구역 바깥으로 이주하면서 겪는 가장 어려운 점은 이주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재건축이든 재개발이든 구역을 정비하는 곳의 주요한 경계는 자동차 도로에 의해 구분되는데 이 도로 때문에 동물은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목숨을 거는 도박과 같다.
내가 활동하는 재건축 지역도 마찬가지다. 한 면은 남부순환도로가 있고 다른 한 면은 왕복 6차선 도로다. 그리고 삼각형의 나머지 한 면이 근린공원, 산이다. 내가 맡은 곳이 산의 경계 면이라 수년 째 고양이들을 산으로 유인하며 자발로 이주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재건축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이주를 마쳤을 때, 근린공원에도 사람의 흔적이 자취를 감췄다. 아주 가끔 산행하는 사람과 이주한 고양이와 고양이를 챙기는 나와 노숙자뿐이다. 그렇게 사람의 흔적이 지워져 나갈수록 야생동물의 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청서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먹이 활동을 하고, 말랑한 공 같은 매끈한 털을 가진 두더지가 땅을 순식간에 파고 들어가고, 황조롱이가 나무 꼭대기에서 활강하듯 날아가고, 너구리가 사람을 보고도 경계 없이 유유자적 걸어가고, 물까치가 울창한 관목 사이를 총총 뛰어다닌다. 작은 산이니까 이 정도 동물은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봄부터 수풀 속에서 내 기척에 놀라 도망가는 갈색 털의 동물을 목격했는데 뒤태만 보고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판단했을 때, 어쩌면 고라니일지도 모르겠다는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도망치는 소리만 확인하며 궁금증이 커져가던 차에 드디어 만났다.
고라니!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인 사체로만 만났던 고라니를 불과 50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한 것이다. 웬일인지 나를 보고 도망치지 않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들여 숲 속에서 나를 관찰해 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리에서 고라니를 마주하니 심장이 쿵쾅거리고 설레었다. 정말 인터넷 정보에서 말한 대로 길이는 1미터 정도의 작은 체구를 가졌고, 귀가 얼굴만큼 커다랗고 갸름한 얼굴을 가진 고라니였다. 무심한 척하며 내가 먼저 자리를 뜨니 고개를 뒤로 돌려 제 몸통을 핥았다. 나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뭔가 그에게 인정받은 느낌이 들어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라니는 우리나라에서 대략 10만 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현재는 인간의 영향으로 점차 개체수 감소 현상을 보이는 중이다) 번성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는 작은 체구와 먹이나 서식지를 적게 이용하고 번식력이 좋은 점 그리고 단독생활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라니의 주요 서식지는 한국과 중국의 일부지역으로 우리에게는 흔한 동물이지만 세계자연보존연맹에서 지정한 멸종위기종이다. 국내에서는 농가에 피해를 주는 일이 많아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점점 서식지가 줄어들고 인간과 접점이 늘어나면서 로드킬이나 사냥에 의한 고라니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내가 고라니에 대해 부쩍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고속도로에 쓰러져있던 모습을 본 이후다. 동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가장 많이 목격하게 되고 가장 많이 불편했던 모습이 바로 자동차에 치인 동물의 사체를 보는 일이다. 사람이 자동차에 치어 죽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물이 차에 치어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 그건 자연스럽지 못한 일 같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슬프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데 차에 치어 죽은 동물은 죽는 순간까지 유린당한 모습 같아서, 그들을 유린하는데 내 삶도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했지만, 한편으로는 늘 동물을 인간에 비해 열등하거나 수동적인 존재로 치부하는데서 오는 나의 편견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고라니는 보기 드물게 이 땅에서 번성한 동물 중 하나다. 인간의 입장에서야 유해조수지만 동물들 세계에서 그들은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적응도 높은 종, 특히 인간이 만든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높은 동물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의 전망을 높게 평가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호랑이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표현하고(우기고), 올림픽 때는 한국 대표 상징으로 호돌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우리는 최고 포식자처럼 강하다는 이미지를 드러내고픈 열망 말이다. 그렇게 강함을 보여주는 한국의 상징적인 동물이지만 이 땅 어디에도 살지 않는 마치 설화 속에나 나올 상상의 동물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겪으며 한반도에 호랑이 서식이 불가능해진 것이 오히려 낭만화를 부추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농가에 경제적 타격을 입힌다며 몰아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없다. 이 땅은 호랑이가 살 수 없는 곳이다. 단지 식민지 시절의 착취 때문이 아니라 이 땅 어디에도 호랑이가 살 만큼의 자원과 영역이 없다. 우리를 호랑이로 정체화하면서 정작 호랑이는 살 수 없는 곳을 만들어 놓고 아직도 한반도 이미지에 호랑이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좀 기만적이지 않나 싶다.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꼬리⌟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꼬리’는 더 이상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별칭이며, 수컷 알파 호랑이의 삶을 추적한 기록물이다. 야생동물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은 분명 힘든 일이고 그런 일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행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함에도 에세이 전반에 흐르는 인간 남성 특유의 마초적 낭만주의 감성이 넘쳐흘러 정작 주인공인 꼬리에게 집중하기 어려웠다. 인간이 동물에 대해 글을 쓸 때 벌어지는 흔한 증상 중 하나가 바로 대상과 자기의 동일시인데 이 에세이 전반이 그러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때는 잘 안 드러나는 것이 사람이 동물에 대해 글을 쓸 때면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중심주의. 그 인간중심주의 중에서도 지배적인 힘이 무엇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에세이를 보며 작금의 동물을 위한다는 모든 활동들이 ‘온정주의 Paternalism’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꼬리⌟가 세상을 호령하던(이런 표현은 역시 진부하다) 수컷 호랑이의 몰락을 따라가는 저자의 지배적인 남성성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활동이 어느 지점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를 잘 드러낸 책이었다면, 그 반대의 시선을 전하는 책이 있다. 흔하디 흔해서 천덕꾸러기 신세인 고라니를 기록한 사진집 ⌜이름보다 오래된⌟은 고라니를 종 species이라는 묶음에서 해방시킨 사진집이다. 고라니의 초상화는 고라니가 인간처럼 개성을 가진 생명체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언하는 외침 같았다. 하나하나의 얼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겨냈을 역경들이 한데 모여 비록 인간에게는 유해조수일지 몰라도 자신들이 이 땅에 서식할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우리가 찾아보려 한 적이 없으니 늘 동물은 추상적이다. 작가가 애써 그 모습을 오랜 시간 공들여 추적한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사실 ⌜꼬리⌟도 어려운 작업을 기록한 것임에 틀림없다. 동물을 기록하는 일은 그 어떤 작업보다 고되고 인내심을 시험하는 기다림의 시간들 속에서 한 인간이 무척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포식동물에 대한 이해가 강함이고 초식 동물에 대한 이해가 약함이라는 도식은 자연을 이해하는 흔한 방식이면서도 가장 오류가 많은 이해 방식이다. 실제 생물학자에게 이러한 도식을 들이밀면 경악할 것이다. 자연에서 강함은 살아남아 자기 종을 이어나가는 존재에게 주어져야 할 형용사다. 그런 면에서 호랑이보다는 고라니가 강하다. 특히 한국처럼 더 이상 야생이랄 곳이 없는 곳에서 인간과의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 고라니가 한국의 대표 동물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그들의 적응력이 무엇인지, 그리하여 그들을 어떻게 잘 지켜나갈 수 있는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