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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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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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혹독한 시절
홀로 피어난 꽃
하얀 눈 속에서
유난히도 붉더니
꿈도 한철
꽃잎만 보낼 수 없어
온몸 함께 지는 꽃이여
필 때도 질 때도
맑은 빛 그대로
매듭짓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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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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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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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첫 행은 동백을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한 계절을 통과해 온 생의 상징으로 세운다. ‘혹독한 시절’과 ‘홀로 피어남’은 자연의 조건을 넘어, 인간이 겪는 고된 시간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며 서 있는 존재의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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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 속의 붉음은 대비의 미학이다. 이 붉음은 눈의 냉기에 대항하는 열이 아니라, 묵묵하게 자기 색을 지켜내는 고유함이다. 시인은 그 색의 선명함을 ‘꿈도 한철’이라는 문장으로 절묘하게 접어 넣는다. 아름다움과 덧없음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씁쓸한 긴장감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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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질감은 떨어질 때 더욱 분명해진다. ‘꽃잎만 보낼 수 없어 / 온몸 함께 지는 꽃’이라는 표현은 동백 특유의 생태를 정확히 포착하면서도, 그것을 생의 결단으로 번역한다. 반짝 피어 잠시 흔들리다 사라지는 꽃과 달리, 동백은 마지막까지 온전한 형태로 스스로를 내어준다. 시인은 그 점을 ‘함께’라는 말에 실어 깊이 있게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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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진다’는 방식은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화려한 순간만 남기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존재의 윤리다. 그것은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생의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지키는 품격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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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필 때도 질 때도 / 맑은 빛 그대로”라는 구절은 이 시의 핵심이다. 생의 고점과 저점에서 동일한 빛을 유지하는 일,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다. 많은 존재가 피는 순간만 빛나고, 지는 순간엔 흔적조차 흐려지지만, 동백은 시작과 끝의 무게가 같다. 시는 그 균형을 ‘맑다’는 한 단어로 정직하게 품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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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맑음은 결코 순진함이 아니다.
혹독한 계절을 살았던 기억을 통과한 뒤에야 얻어지는 투명성이다.
시인은 동백을 ‘맑다’고 말하되, 그것이 경험 없는 순백이 아니라 삶의 얼룩을 다 품은 뒤 남는 최종적 결정을 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맑음’은 밝음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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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동백의 생태적 특징을 넘어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 확장되는 지점은 바로 ‘매듭짓는 삶’이다. 무심코 지나가는 표현 같지만, 존재가 책임 있게 끝을 맺을 줄 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매듭은 흩어짐을 막는 행위이자, 다음 계절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다. 동백의 삶을 바라보며 시인이 제안하는 윤리는 바로 이 ‘단정한 마무리’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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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감정이나 과장된 장식 없이, 시의 문장은 짧고 단정하다. 동백이란 이름 자체가 이미 완결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불필요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꽃의 행동과 색, 그 떨어지는 방식만으로 존재의 품격을 드러낸다. 이런 간결함은 오히려 더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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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시가 말하는 ‘동백’은 자연의 일부라기보다, 한 인간의 생을 관통하는 내적 태도이다.
피는 순간, 지는 순간 모두 스스로의 색을 잃지 않는 삶. 그리고 마지막엔 흔적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자신을 단정히 접어내는 품위. 시는 그것을 꽃 한 송이의 열과 고요에 담아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동백을 노래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