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박성진 문학박사 정근옥 시인 사의재에서 다산 영혼의뜰》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사의재에서

— 다산 영혼의 뜰

정근옥(시인)


남녘 바람 드센 강진땅,

억울한 얽힘 속에 몸은 갇혔어도

흙냄새 스며드는 초옥에서

다시 마음을 고쳐 세웠네


추레한 지붕 아래 촛불 켜고,

묻고 답하던 젊은 눈빛들,

생각은 깊고 신중한 행동으로

배움 길을 다져갔네


외롭고 삭막한 땅이라도

책상 앞에 앉아 정신을 가누면서

한 글자 한 숨결마다

세상에 닿을 길을 찾았네


우국지탄이 사슬처럼 얽히어

번뇌와 고통이 밀려와도

인내의 침묵 속에서

목민을 위한 참마음을 키웠네


별을 보며 숭고의 뜻을 세우고

사의재 깃든 꿈을 벼리 삼아

백성의 도리를 밝히는 길이 되어

역사의 강으로 흐르네




사의재에서 다시 태어난 인간 다산의 마음을 읽다


강진의 바람은 추위가 아니라 ‘깨어남의 신호’였다


정근옥 시인은 강진을 단순한 귀양지로 바라보지 않는다.

남녘의 바람, 갇힌 몸, 억울한 시대… 이 모든 현실적 고통 위로,

그가 보려 한 것은 다산이 다시 태어난 자리였다.

역사는 흔히 다산의 유배를 ‘쇠락의 시간’으로 말하지만,

시인은 그 시간을 오히려 정신의 연금술이 일어난 순간으로 읽어낸다.

강진의 바람은 차갑지만, 시가 말하는 그 바람은

한 인간의 마음을 더 맑게 빚어내는 ‘정화의 바람’에 가깝다.

이 첫 연에서 시인은

“억울한 몸의 감금보다 더 큰 것은 마음의 재건”

이라는 사실을 조용하게 일깨운다.


흙냄새 초옥, 낮은 곳에서 다시 세운 마음


다산의 공부는 화려한 서재가 아니라

흙냄새 짙은 초옥에서 시작되었다.

시 속의 초옥은 초라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숨의 자리’로 그려진다.

흙냄새가 스며든 곳은

곧 뿌리로 돌아가는 자리이며,

사람이 가장 낮아질 때 비로소 보이는

‘참된 배움의 출발점’이다.

정근옥 시인은 그 사실을

그 어떤 과장도 없이 단정한 문장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읽는 이 또한 초옥의 들창문에 앉아

다산이 마음을 고쳐 세우던 순간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촛불 아래 이루어진 ‘조용한 사유의 공동체’


“묻고 답하던 젊은 눈빛들”

이 구절은 사의재가 단순한 은둔의 집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다산은 고립되어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닫혀 있지 않았다.

촛불 아래,

또렷한 제자들과의 문답이 이어졌고

그 문답이 곧 조선 지성사의 한 축을 이루었다.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판단을 서두르지 않고,

생각을 깊게 가다듬으며 배우던 그 젊은 눈빛들--

그 속에 다산의 학문이 살아 있었다.

학문은 화려한 말이 아니라

삶을 바로 세우는 태도라는 사실을

시인은 조용한 묘사로 제시한다.



고독의 자리에서 태어난 문장의 윤리


강진은 외롭고 삭막한 땅.

그러나 그 외로움은 다산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세웠다.

책상 앞에 홀로 앉아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으로 적어 내려가는 모습은

단순한 ‘저술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빚는 과정이었다.

정근옥 시인은 이 장면을 특별히 강조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숨결이 깃들고,

그 숨결마다 세상과 백성을 향한 마음이 스며 있다.

다산의 문장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힘이었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약속이었다.


우국지탄의 사슬 속에서 흔들리지 않은 마음


“우국지탄이 사슬처럼 얽히어”

이 표현은 단순히 시대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슬은 개인의 마음을 짓누르고,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성인으로서의 책임을 끝없이 되물었다.

다산은 무력하게 주저앉지 않았다.

고통을 바로 바라보고,

때로는 꺼내기도 어려운 번민과 마주하며,

거기서 ‘목민의 정신’을 길어 올렸다.

시인은 다산의 이 내면적 싸움을

짧은 행 속에 잔잔한 울림으로 담는다.


"목민심서"를 싹 틔운 침묵의 힘


“인내의 침묵 속에서”

이 침묵은 굴종의 침묵이 아니다.

자신을 단련하고,

백성을 향한 길을 다시 그리는 조용한 힘의 시간이다.

다산의 사유는 겉으로 떠들썩한 정치적 논쟁보다

이 ‘침묵의 방’에서 더 깊어졌다.

그 침묵 속에서

백성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관리는 어떻게 백성과 함께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들이 줄기차게 자라났다.

정근옥 시인은 이 성찰을

“참마음”이라는 단단한 단어로 명명한다.


별빛 아래에서 다져진 숭고한 뜻

유배지의 밤은 길고 고요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 밤을 ‘절망의 어둠’으로만 보지 않는다.

다산이 별을 바라보던 그 시간이

오히려 가장 큰 희망의 자리였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별을 본다는 것은

멀리 보는 것이다.

시간을 건너보는 것이다.

오늘의 고통을 넘어

내일의 질서를 꿈꾸는 것이다.

그 별빛 아래에서 다산은

학문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를 위한 ‘도리’로 다시 세웠다.


사의재의 꿈이 역사의 강으로 흘러가다


시의 마지막 연은

다산의 꿈이 현실의 정치나 한 시대의 담장을 넘어 역사의 흐름으로 이어졌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때로 작은 공간을 무시하지만,

사의재 같은 작은 초옥이

한 시대를 바꾸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의 씨앗이

바로 이 좁고 초라한 초옥에서 움텄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지성사의 큰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그 아이러니를

“강으로 흐른다”라는 너그러운 문장으로 풀어낸다.

강은 방향을 잃지 않고,

때로는 굽이치며, 반드시 흘러간다.

다산의 정신도 그러했다.


오늘 우리에게 사의재는 무엇인가

정근옥 시인의 시가 가진 힘은

역사를 단순히 회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시는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에게도 사의재가 있는가?”

억울함 속에서도 마음을 다시 세울 자리,

고독 속에서 생각을 더 깊게 가라앉힐 자리,

혼란 속에서도 도리를 다시 묻는 자리이다.

이런 ‘내면의 사의재’를 갖고 산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역사적 다산을 기리는 동시에

오늘의 우리를 향한 ‘정신의 초대장’이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성진 《최선미 시인-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