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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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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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情 이인애
한 맺힌 겨레의 혼
가지마다 진홍빛 등불을 밝혀
고색창연 수놓은 남녘 하늘
순국 열사의 정기 혈관에 새겨
한겨울 꽃을 피워낸 불굴의 의지
주야장천 비나리 밝은 조국의 앞날
한 가지 염원으로 빚은 은근한 향기
풍찬노숙 불사한
구국 전사의 넋이런가
사월 어느 날
죽어도 뜻을 흩트리지 않으리
단박에 통째로 낙하하니
지조도 드높구나
내딛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선혈이 낭자한
애끓는 충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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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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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에서부터 이 시는 자연을 노래하려 하지 않는다. 꽃은 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꽃은 마음이고 정신이고 역사다. 동백의 진홍빛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겨레의 상처이자 등불로 읽힌다. 시인은 꽃을 보는 순간 이미 역사를 보고, 역사를 보는 순간 이미 충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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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동백이 피는 자리는 자연의 풍경이 아니다. 그곳은 한민족의 기억이 켜켜이 밴 자리다. 남쪽이라는 공간은 이 나라의 첫 분단 기억이 서린 장소이고, 동시에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이 끊임없이 타오르던 장소였다. 진홍빛이 하늘을 수놓는 순간, 이 시는 자연 묘사에서 정신 묘사로 곧바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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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피를 꽃의 혈관이라 부른 표현은 이 작품의 중심 미학이다. 혈관은 생명을 흐르게 하는 통로이며, 동백의 줄기는 피를 전하는 길이다. 붉은 꽃잎이 단지 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정기를 옮기는 상징체계로 자리 잡는다. 꽃과 조국이 서로의 몸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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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를 쓰며 기도하는 자세는 고행이 아니라 기원이 된다. 이 기원은 죽어간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국을 이끌어 가려는 염원이다. 향기가 은근한 것은 겉으로 떠벌리지 않는 민족의 마음 때문이다. 희생을 소리쳐 말하지 않는다. 조용히 내면에서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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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찬노숙이라는 다섯 글자는 영웅주의가 아니라 소임을 의미한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소리 내어 떠드는 일이 아니라, 숨결로 감당하는 일이다. 동백은 바로 그 숨결이다. 꽃잎 하나가 불사르는 정신의 깊이, 그것이 이 시의 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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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은 우리 역사의 특별한 달이다. 많은 피 흘림과 저항이 담겨 있다. 시인은 날짜를 밝히지 않고도 사월의 상징을 호출한다. 이것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시대가 축적한 지조의 서사다. 죽어도 뜻을 흩트리지 않겠다는 선언은, 희생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본령을 굳게 붙잡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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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 통째로 떨어지는 순간은 이 시의 결정적 이미지다. 꽃잎이 흩어지지 않는 까닭은 혼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절개다. 낙화는 소멸이 아니라 품위다. 이 한 장면은 조선의 선비정신에서 독립운동가의 지조까지 이어지는 정신사 전체를 품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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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은 흔적이 아니라 증언이다. 발자국마다 선혈이 낭자하다는 표현은 현실의 역사를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흔적을 시적 언어로 드러낸 것이다. 꽃이 피어 있는 한, 그 발자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꽃의 붉음과 선혈의 붉음이 하나의 색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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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정조는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슬픔은 곧 책임이 되고, 책임은 곧 충절이 된다. 애끓는 마음은 단순한 감정의 터짐이 아니라, 지켜내야 한다는 윤리적 외침이다. 정신은 눈물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뼈로 새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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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작품은 동백이라는 작은 꽃을 통해 민족의 정신사를 해명한다. 자연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로, 꽃잎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몸의 세계에서 영혼의 세계로 옮겨가는 시적 이동이 이루어진다. 동백은 붉게 피지만 그 붉음은 포효가 아니라 단단한 침묵이다. 떨어지지만 분열이 아니라 온전함이다. 꽃이지만 꽃을 넘어선 정신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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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가진 힘은 화려함이 아니라 결기이다. 감각이 아니라 사유이다. 동백이 자연의 한 계절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정신을 수호하는 밝은 등불로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