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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늘샘 안혜초 시인-활화산》

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by 박성진

박성진 문화평론가



〈활화산〉


시인 늘샘 안혜초


참으세요


그러나 너무

오래 참지는 마세요


너무

오래오래

참다 보면


어느 순간

지진이 되어

활화산이 되어


폭발할지도 모르니까요




평론- (사유, 존엄, 위로)


참는다는 것은 오래도록 미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참는다는 행위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참는다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고,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든다면

그것은 덕목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가깝습니다.


안혜초 시의 〈활화산〉은 이 지점을 조용한 목소리로 건드립니다.

“참으세요”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그러나 너무 오래 참지는 마세요”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문장은 삶을 많이 본 사람의 깊은 배려가 담긴 말입니다.

참아야 할 때도 있지만,

참아서 자신을 잃을 때는 멈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무 오래오래”라는 반복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시간이 감정 위에 쌓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참음이 시간이 될 때, 그 시간은 마음속에 눌린 채,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시인은 “어느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감정이

마음의 벽을 밀어내고 자기 길을 찾아 나오는 순간입니다.

그것을 시인은 “지진”이라 했습니다.

지진이라는 은유는 정확하고도 섬세합니다.

지진은 땅 속 깊숙이 누적된 힘이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감정 또한 그렇습니다.

오래 참고 눌러두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정은 안에서 서서히 움직이고,

결국 자기의 목소리를 찾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시인은 마지막 은유로 “활화산”을 가져옵니다.

이 활화산은 파괴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이 활화산은 “아직 살아 있다”는 존재의 신호입니다.

폭발이란 표현은 사실 위협이 아니라

“내가 나로 돌아오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살아 있는 마음이 있어서 터지는 것이지,

죽어버린 마음이 터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폭발을 두려움이나 분노로만 보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활화산은 위험하기보다 인간 존재의 뜨거움을 보여줍니다.

아직 삶을 향한 의지가 있다는 뜻이고,

아직 상처를 느낄 만큼 살아 있다는 뜻이고,

아직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가 위대한 이유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사람에게 따스한 말투로 건넨다는 점입니다.

“너무 오래 참지는 마세요.”

그 말속에는 강요도, 피교육적 어조도 없습니다.

그저 사람을 이해한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해주는 다정한 조언입니다.

문학은 삶을 대신 살아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문학은 사람을 치료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사람이 스스로 일어설 힘을 줍니다.


〈활화산〉은 바로 그런 시입니다.

존재를 회복시키고, 감정을 인정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게 해주는 시입니다.


이 시는 경고가 아니라 위로입니다.

꾸짖음이 아니라 이해입니다.

지시가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독자는 이 시를 통해 한 가지를 배웁니다.

참는 것이 어른스러움이 아니라,

때로는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슬픔일 수도 있다는 것을.

폭발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음의 증명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 활화산은

파괴의 불꽃이 아니라 존재의 숨결입니다.

남에게 상처 주기 위한 폭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언어입니다.

안혜초 시인의 평생 시력(詩歷)은

이 짧은 시에서도 깊은 울림으로 살아 있습니다.

말은 줄였지만, 뜻은 넓고,

문장은 짧지만, 사유는 깊습니다.

그 깊이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한국 시문학이 가야 할 길은

이런 시에서 배워야 합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문학,

그것이 결국 문학의 최종 목표입니다.


〈활화산〉은 그 목표를 잃지 않은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우리는 마음이 조금씩 풀립니다.

조금씩 위로받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문학은 바로 그런 순간을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시는, 그 역할을 더없이 충실히 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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