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토리얼 아님
날씨가 유난히 좋은 4월에 드디어 두 아들내미 뿌꾸와 뽀또가 태어나버렸다!
우리는 쌍둥이라, 어찌 보면 당연히 제왕절개 수술로 뿌꾸 뽀또를 세상 밖으로 꺼냈다. 아내 말로는, '배를 두세 번 흔들더니, 수술이 끝나버렸다'라고 했다. 하지만 예견되었던 대로 그 이후는 커다란 고통의 후불제였다. 수술이 끝난 뒤 약 40분 뒤에 만난 아내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춥다며 떨고 있는 아내를 보며, 간호사 분들에게 '아내가 너무 추워하는데, 담요라도 더 덮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지만, 간호사 분들은 '몸이 떨리는 건 자궁 수축제를 맞아서 근육이 떨리는 것이고, 또 너무 따뜻하면 오히려 더 안 좋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따뜻한 담요 한 장을 목과 가슴 부분이 얹어 주셨다.
아내를 만나기 전, 먼저 만난 두 아기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아이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가만히 있다가 가끔씩 울음을 한 번 뱉어내고 있었고(뿌꾸), 또 한 아이는 눈을 위로 희번덕뜨며 계속 울고 있었다(뽀또). 보자기에 싸여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크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체감상 한 뼘 반 정도 되어 보였다. 그리고 제일 중요했던 포인트는.. 꽤 귀여웠단 사실이었다. (귀여운 게 최고!)
덜덜 떨고 있는 와이프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친인척,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이었다. 일단 가장 걱정하고 계실 장모님께 무사히 아기들을 만났고, 와이프도 옆에 잘 누워있다고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수술 들어가기 직전 아내에게 처제가 전화가 왔었는데 못 받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며, 나에게 꼭 처제에게 연락하라고 비몽사몽 한 와중에 옆에서 계속 신신당부하던 와이프덕에 누구보다 빨리 처제에게 연락을 돌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한 간호사 분이 입원실로 안내를 해주셨다. 나는 아내를 두고 먼저 5일 치 짐을 들고 입원실로 올라갔다. 수술하기 전에 입원 수속을 먼저 진행하며 몇 인실에 묵을지 결정했는데, 문제는 1인실 배정이 행운의 영역이라는 것. 원래는 전 날, 입원 수속 카운터에서 누가 누가 부지런히 먼저 와 있나~ 로 대기 순서가 정해졌지만, 최근에는 번호표 뽑기도 웹 페이지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손가락이 느려 대기번호 9번을 얻게 되었다. 충격적 이게도, 1인실은 대기번호 3번에서 동이 나버렸다. 입원 수속 카운터 직원은 나에게 '운이 나쁘면 8인실에 배정될 수도 있어요..' 하며 한껏 안타깝지만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로 안내했다. 결국, 우리는 안타깝게도 5인실로 배정이 되었지만, 이튿날에는 운 좋게도 1인실로 방을 옮길 수 있었다.
5인실에서 짐을 대충 정리(라고 부르고 쌓는다고 말한다..)하고 조금 기다리니, 아내가 환자용 이송 침대를 그대로 타고 방으로 들어왔다. 병실에 있는 침대로 아내를 옮기기 위해 간호사 두 분과 함께 나도 아내의 어깨와 등 아래를 받치고 거의 집어던지듯 아내를 침대로 옮겼다. 병실이 너무 좁아 들 수 있는 공간도 잘 안 나와 말 그대로 '던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 옮겨진 아내는 곧바로 고통의 눈물을 흘렸고, 그걸 보던 간호사 분은 '많이 아프시죠 ㅠ 울지 마세요~ 이제 엄만데 ㅠ' 라며 위로? 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엄마라도 아픈 건 어쩔 수 없는걸...
이후 간호사 분은 남편이 해야 할 일과 입원실 스케줄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14시에 신생아 실로 가면 뿌꾸와 뽀또를 만날 수 있었다. 내 핸드폰과 아내의 핸드폰과 디지털카메라, 총 3대의 카메라를 주렁주렁 들고 가서 신나게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댔다. 물론 유리벽 너머로밖에 볼 수 없었고, 유리벽에 비친 주변 사물과 사람들 때문에 사진이 그렇게 잘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뿌꾸와 뽀또는 신생아스럽지 않은 비주얼을 뽐내고 있었고, 특히 둘 다 코가 왜 이리 오똑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산모와 남편들은 뿌꾸와 뽀또를 보며, '어머, 쟤네는 진짜 귀엽게 생겼다. 어떡해 쌍둥이인가 봐 너무 귀엽다 ㅠㅠ' 며 한껏 나의 어깨를 위로 올려주었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ㅎㅎ
너무나 귀엽고 예쁘게 빚어진 두 아이를 뒤로하고 나는 여전히 피를 쏟으며 고통에 신음하는 아내에게 돌아갔다. 아내는 출산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 채 고통의 후불을 오롯이 본인의 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