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내리사랑'이란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보편적이지만 나이와 항렬이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의 내리사랑은 우리만의 특수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반대말인 치사랑을 포함한 속담으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가 있다.
남동생이 둘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을 챙기는 게 당연했고 모두 성인이 된 지금도 이 녀석들이 직장에서 일을 한다는 게 짠할 때가 있다. 특히 막내는 대학 졸업 후 지방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출퇴근을 해서 더 마음이 쓰인다. 막냇동생은 내가 8살 때 태어나서 어렸을 때의 모습이 꽤 또렷하게 기억난다. 태지도 안 떨어진 아가가 신기해서 떼지 말라는 태지를 몰래몰래 떼내던 기억, 업어주겠다고 했다가 뒤로 고꾸라뜨렸던 기억, 엄마 대신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던 기억이 있어 나보다 한참 어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렇게 어리게만 느껴지던 막내에게 이번 이사 때 크게 도움을 받았다. 임직원 찬스로 가전을 엄청 싸게 구매한 것이다! 이외에도 박봉인 나보다 훨씬 더 잘 번다는 이유로 요즘은 동생들에게 얻어먹을 때가 많다. 처음에는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는 듯했으나 이제 현실을 인정하고 감사히 얻어먹고 있다.
이렇게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챙기는 게 익숙했던 나도 무조건 막내가 되는 상황이 있으니, 아이의 친구 엄마들과 만날 때이다. 제일 친하게 지내는 한 집을 빼고는 다들 나보다 적게는 3살, 많게는 15살이 많았다. 아이를 통해 알게 된 사이지만 언니들은 나를 항상 챙겨주고 기특해했다. 시험 준비할 때는 응원도 해주고 합격했을 때나 청약에 당첨되었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도 어느덧 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지고 막내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람 간의 관계는 물과 같아서 내리사랑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라고 믿고 있는 나에게 친정에 합가하면서 큰 시련이 닥쳤다. "받아만 주면 집안일은 내가 다 할게!"라고 호언장담하고 들어왔지만 진짜로 집안일을 내가 90% 이상 도맡게 되자 불만이 스멀스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딸인데 저렇게까지 다 맡길 수가 있나? 딸이 해주는 밥을 먹다 보면 한 번쯤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 아닌가? 적어도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빨래를 빨래통에 넣는 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지금 나는 휴직 중이고 엄마, 아빠는 여러 가지로 바쁘니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휴직 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걸 생각하면 그냥 나에 대한 사랑이나 배려가 부족한 거로 느껴질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나라면 숭이가 성인이 되었어도 뭐든 해주고 싶을 것 같은데 숭이가 크면 나도 저렇게 변할까? 큰딸이라 나를 자식보다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철이 없나? 얹혀살게 해 줬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나?
매일 마음속에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 이해와 연민이 오가는 동안 시간은 흘러 이삿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모쪼록 큰 갈등 없이 1년 여 간의 합가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균형 있는 부모-자식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디데이를 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