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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Sep 10. 2024

12-3. 작품을 더 매력 있게 만드는 주인공의 결함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모노가타리> 3

작품에 깊이를 더하는 결함 있는 속편 주인공들


겐지가 죽고 난 이후의 <겐지모노가타리> 속편은 가오루와 니오노미야, 그리고 그들이 사랑한 여인들이 주인공이다. 가오루는 대외적으로는 겐지의 아들이나, 겐지의 부인 온나산노미야가 가시와기라는 남자와 외도하여 낳은 자식이다. 니오노미야는 겐지의 외손자이자 천황의 아들이다. 남자가 겐지에서 이 둘로 바뀌었을 뿐인 것 같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전반부에 비해 개개인의 심리묘사가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인지 작품 자체도 더 무겁고 깊어졌다. 작가가 본편을 쓰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속편을 썼다는 주장에 믿음이 간다.


본편의 겐지는 그 어디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이다. 외모뿐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고와서 엄청난 바람기를 갖고 있음에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속편의 두 남자는 겐지를 질적인 면에서 쪼개 놓은 느낌이다. 두 남자 모두 외모가 훌륭하지만 겐지에 비하면 부족하다. 심성은 두 남자가 확연히 다른데, 가오루는 겐지의 신중함을, 니오노미야는 겐지의 충동성과 바람기를 가졌다. 그렇게 한 가지씩만 가지니, 겐지에 비해서 이 둘은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가오루는 너무 신중해서 제때 행동을 하지 못해 그의 연인들을 괴롭게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결국엔 후회하고 만다. 우지의 큰 아씨를 죽게 한 것, 작은 아씨와 우키후네를 니오노미야에게 빼앗긴 것이 그렇다. 그리고 가오루는 사고가 편협하고 속이 좁다. 그렇게 사랑했던 우키후네가 니오노미야와 바람이 난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는 그녀에 대한 마음이 한없이 냉정해진다. 게다가 그것을 그녀가 알아챌 수밖에 없도록 행동한다. 


겐지의 부인 온나산노미야가 가오루의 아버지인 가시와기와 정사를 벌인 것을 겐지가 알게 되었을 때, 겐지의 대처와는 사뭇 다르다. 겐지 역시 분노했지만 분노의 화살은 내연남인 가시와기에게만 쏘았다. 결국 그 탓에 가시와기가 죽기는 했지만, 겐지는 부인을 표면적으로나마 계속 아꼈다. 반면 가오루는 정작 잘못이 있는 니오노미야에게는 티도 못 내면서 우키후네만 힘들게 한다. 사실 우키후네는 니오노미야에게 겁탈을 당한 것인데도, 가오루는 대하기 쉬운 우키후네에게만 불편한 심정을 드러낸다. 


애초에 가오루가 우키후네를 대하는 방식부터가 겐지와는 매우 달랐다. 신분이 낮지만 사랑한 여인으로 겐지에게 아카시 부인이 있다면 가오루에게는 우키후네가 있다. 둘 다 도읍에서 떨어진 오지에서 만났다. 겐지는 아카시 부인의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매우 아끼며 관심을 쏟고 도읍으로 데려온다. 가오루는 도읍에 데려오겠다는 생각만 할 뿐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않고, 그 과정에서도 일이 바쁘다며 소홀하다. 그렇게 외로움에 사무치던 우키후네가 니오노미야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누구나 상상이 가능하다. 그 결과는 정 반대로 흘러간다. 아카시 부인은 겐지의 딸을 낳고, 그 딸은 결국 천황의 부인, 그것도 정실(중궁)이 된다. 반면 우키후네는 니오노미야에 대한 그리움과 가오루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귀신에 씌어 삶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카시 중궁이 가오루를 불러 우키후네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주며 둘이 다시 결합할 기회를 주는 장면은 매우 묘하다. 겐지에게 구원을 받은 결실인 아카시 중궁이 가오루의 과오를 바로잡아 주려한다. 하지만 가오루는 아카시 중궁이 자기 아들인 니오노미야에게도 이 사실을 말했을 수 있고, 그래서 니오노미야가 이미 우키후네를 만나 들락거릴지도 모른다고 혼자 마음대로 생각하고는 적극적으로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신중함을 넘어 우매하고 편협하며 우유부단하다.


그렇다면 니오노미야는 어떤가. 가오루가 겐지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사실은 가시와기의 아들이라 그런지 바람기는 없고 한 여자에게 온 마음을 쏟는 모습이 매우 닮았다. 반면 겐지의 손자인 니오노미야는 겐지의 바람기를 그대로 빼닮았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여인만 보면 제 것으로 만든다. 심지어 황자인 데다 장차 천황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막힐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까진 겐지와 비슷하다 할 수 있으나, 다른 점은 여인을 대하는 마음이다. 겐지는 그것이 바람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자 하나하나에게 진심을 다했다. 그리고 정사의 상대가 된 여인은 어지간해서는 끝까지 책임졌다. 그가 육조원이라는 하렘을 만든 것도 그 증거다. 심지어는 못생기고 성격도 유별나 비난을 받는 여인까지도 품었다. 하지만 니오노미야는 그런 것이 없다. 데리고 놀다가 새로운 여인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방자하다고 비난한다. 그의 어머니 아카시 중궁마저도. 


이런 두 남자를 보고 있으니 겐지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이 두 남자 중 하나가 겐지였다면, 후반부 여주인공들은 그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과는 별개로, 작품 자체는 전반부보다 더욱 흥미롭고 깊이 있게 느껴졌다. 바람기마저 진심으로 포장되어 완벽한 캐릭터인 겐지에서 결함을 가지고 있는 두 남자로 넘어오면서, 이야기는 더욱 소설적인 깊이를 갖는다. 세상에 결함이 없는 사람은 없기에 겐지보다는 이 두 남자에게 더욱 이입이 되며 느껴지는 바가 많다.


전반부는 겐지라는 희대의 풍류남이 세상을 어떻게 즐기며 사는지, 그리고 겐지라는 완벽한 남자의 매력이 무엇인지, 그의 여인들을 겐지가 어떻게 품어내는지를 하나하나 맛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후반부는 두 남자와 그 사이에 끼인 여인들의 복잡하고 답답한 연애관계 속에서 각자의 심성이 어떤 결말을 이끌어내는지를 보는 재미가 좋았다. 사실 후반부의 중반 정도까지는 니오노미야는 꼴 보기 싫고, 가오루가 훌륭하다고 여겼다. 절제할 줄 알고 선을 넘지 않는다. 신중하고 품위가 있다. 여인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불교를 탐닉하여 인생의 진리를 종교로부터 찾으려 한다. 그렇게 불교에 정진하는 하치노미야를 만나고 그 딸들을 만나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 니오노미야에 대비되어 그런 가오루의 모습은 하치노미야라는 인생의 스승을 만나 서로 삶의 진리를 논하며 지낼 때까지는 보는 나까지 흐뭇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딸들과 연애관계로 발전하면서 가오루의 답답한 면이 부각되고, 자신이 취할 수 있었던 두 여인을 놓치면서 편협하고 조급한 성격으로 바뀌고 만다. 그래서 후반부의 가오루는 니오노미야 만큼이나 꼴불견이다. 하지만 소설의 캐릭터로서는 매력적이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나, 그것을 알게 된 이후 콤플렉스가 되어 고뇌하는 햄릿형 인간. 반면 니오노미야는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돈키호테형 인간이다. 그 두 사람의 대비가 매우 흥미로운데, 심지어 그 둘이 계속해서 라이벌로 엮이니 흥미진진하다. 


등장하는 여인들도 매력적인데, 가오루를 사랑하면서도 동생을 위해 인내하다가 죽는 큰아씨. 역시 가오루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니오노미야에게 당해서 결혼을 한 작은아씨. 특히 작은아씨는 결혼 후에도 가오루를 대면하는데, 그 장면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가 정사로 이어질지 긴장하며 읽었다. 아쉽게도 가오루가 우키후네를 만나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후반부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우키후네가 있다. 우연히 신분이 상승하고 복잡한 갈등에 휘말려 고뇌하고, 끝내 영락하고 마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 캐릭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우키후네는 겐지이야기 다른 여인들처럼 한 남자에게 몸을 빼앗긴 후 좌절하거나 그쪽에 마음을 빼앗겨 더는 움직임이 없는 여인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가오루와 니오노미야 두 남자와 계속해서 정사를 이어가며 마음의 줄다리기를 한다. 몸으로는 정열적인 니오노미야가 끌리고, 머리로는 자신을 진정으로 아껴줄 것 같은 가오루에게 끌린다. 하지만 결국 마음은 몸을 따라가고, 가오루에 대한 죄책감과 니오노미야에게 결국 버림받을 거란 사실에 괴로워한다. 결국 그녀는 우지강에 투신하는 자살을 택하는데, 그 약해진 틈에 귀신에 씌어 산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러다 중들에게 발견이 되고, 기억을 잃은 척하며 더는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으려 한다. 결국 그녀는 고집을 부려 출가까지 하게 되고 비로소 평안을 얻는다. 출가 소식을 듣고도 가오루가 찾아오지만 그녀는 끝까지 거절하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자 가오루는 딴 남자가 있는 것 같다고 지질한 의심을 하며 작품이 끝난다. 


<겐지모노가타리>를 현대판 일본어로 번역한 역자는 이 작품을 ‘출가이야기’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출가를 하거나 출가에 실패하여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해 봤을 때, 전반부의 히로인인 무라사키 부인은 평생 겐지의 첫 번째 여인이라는 영예 속에서 편히 살았으나 그토록 출가를 원했음에도 겐지의 고집으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반면 우키후네는 그토록 기구한 운명 속에서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고뇌하며 살았으나 결국에는 출가하여 평온함을 얻는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여전히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우키후네 쪽이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다. 


1천 년 전 일본 궁녀 작가의 놀라운 필력


이렇게 <겐지모노가타리> 10권이 모두 끝이 났다. 최초의 심리 소설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1천 년 전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든 심리 묘사와 이야기 흐름, 갈등 구조, 다양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일본의 역사와 그들 특유의 문화와 감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음침함, 음울함, 그리고 감추며 은근하게 드러나는 음란함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성애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나오지는 않지만 은근한 표현들로 자극을 주는 장면들이 많다. 예를 들면 '밤이 긴 계절인데도 둘에겐 무척 짧았다'거나, '밤새도록 즐겼다'거나, '여인이 힘이 없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식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을 궁녀가 썼다는 것. 그래서인지 여성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매우 상세하며, 그녀들의 운명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된다. 그래서 겐지와 가오루 등이 주인공 같지만 결국 이 남자들은 여인의 운명을 뒤흔들어 그녀들의 성장하거나, 영락하거나 출가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뿐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 차이를 보면 남자와 여자, 연애, 사랑, 인생, 종교에 대한 작가의 생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궁 안에서 수많은 남녀 관계를 보거나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처음에는 그 화려함과 자극적인 감각에 심취해 있다가 점차 그 관계들의 무의미함과 허무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안에서 삶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종교적인 부분까지 경험하여 결국 마지막에 우키후네의 출가로 마무리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른 여인을 찾아다니는 남자들은 우키후네나 무라사키 부인에 비해 한없이 한심할 뿐이다. 궁에서 오랜 세월을 살며 이런 대작을 남길 정도로 깊은 상념에 잠겼던 작가의 눈에 당시의 남성과 여성은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겐지모노가타리>는 10권짜리가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쉽게 금방 읽히고, 등장인물이 매우 많은데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워낙 등장인물들의 개성과 이야기가 뚜렷하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작가의 필력이 감탄스럽다. 주인공 겐지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의 행동이나 태도, 언변이 달라지는데, 그럼에도 동일인물이라는 인상을 놓치지 않는 점이 놀랍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복잡해지기 나름인데, 이야기를 알기 쉽게 정리하는 것과 잊을만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상기시켜 주는 기술 또한 훌륭하다. 군상극은 읽기 힘든 만큼 쓰기도 힘들 것인데 이렇게 읽기 쉽게 써냈다는 것은 무라사키의 필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말해준다. 무엇보다 주인공 겐지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까내리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균형감 있는 글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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