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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Sep 04. 2024

12-2. 유아독존 겐지의 아픔과 최후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모노가타리> 2

중년이 된 겐지는 그가 꿈꾸던 하렘을 건설한다. 육조원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영지를 만들어 저택들을 짓고, 자신의 부인들을 살게 한 것이다. 바람을 피우기 위해 여기저기 마음 졸여가며 몰래 찾아다닐 필요 없이, 그저 자신의 집 안에서 걸음만 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여성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육조원에 사는 겐지의 여인들 중 첫 번째는 역시 무라사키 부인이며, 그 외에 유배지에서 만나 딸을 갖게 된 아카시, 우연히 만났으나 마음이 잘 통하고 성품이 뛰어난 하나치루사토, 출가하여 연인이 될 수는 없지만 겐지가 계속해서 아끼는 우츠세미, 외모가 못났으나 가여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돌봐주게 된 스에츠무하나 정도가 있다. 이후 이야기는 이들이 사는 육조원에서 벌어지는 연례행사나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각 부인들의 모습과 겐지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형태로 흘러간다. 전형적인 일본 하렘물이 떠오르는 이야기 구성미여,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전개와 묘사들이 돋보인다.


이후로도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그려지는데 모두 언급하기는 어렵다. 다만 겐지가 중년에 들어선 이후 겪는 정실부인의 외도와 7권 막바지 무라사키와 겐지가 죽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죽은 아오이에 이어 겐지의 두 번째 정실부인이 된 온나산노미야는 가시와기라는 남자와 외도를 저지른다. 처음에는 강간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세태로서는 그러한 여지를 제공한 것 자체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으로 보았으며, 훗날 온나산노미야 자신도 외도의 마음을 품는다. 심지어 가시와기의 아이까지 임신하고 만다. 겐지는 이런 일련의 일을 겪으며 분노하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자신이 과거 기리쓰보제(겐지의 아버지인 전 천황)의 부인 후지쓰보 여어와 동침하여 레이제이 제를 낳은 일을 떠올린다. 자신이 행한 대로 똑같이 당하고 나니 무턱대고 분노만 할 수도 없는 노릇. 겐지는 자신의 아버지 기리쓰보제가 그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도 모른 척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며 한탄한다.


스마로 유배를 갔던 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승승장구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어 왔던 겐지가 말년에 이런 일을 당하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다. 자업자득으로 보이는 상황과, 거기서 오는 난감함과 배덕감 등이 어우러져 꽤나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가시와기의 아들은 겐지 사후 이어지는 외전의 주인공이 되는 것 역시 묘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무라사키 부인이 병으로 죽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이 첩이야말로 작가의 엄청난 필력이 모두 쏟아져 나오는 겐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다. 어린아이였던 무라사키를 납치하듯 데려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워냈고, 그럼에도 사람의 일인지라 완벽하게 원하는 대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훌륭한 여인이 된 무라사키 부인. 정실은 아닐지라도 겐지의 첫 번째 부인이나 마찬가지인 자리를 죽는 그 순간까지 견고하게 지켜 내면서도,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신분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왔다. 그러한 점들이 무라사키 부인에게 사연을 더해 더욱 가련해 보이게 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 내고 누구보다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받는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겐지 역시 그런 무라사키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토록 수많은 여인들과 정을 통했지만 마음속 첫 번째는 항상 무라사키 부인이었다.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얻어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항상 무라사키 부인을 생각하고 걱정했다. 무라사키 부인은 그때마다 마음속으로는 질투를 하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귀여운 애교 정도로만 표현하며, 너무 무심하지도 않으면서 과하게 집착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다. 다른 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품위 있고 관대하며 자상하고 배려심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부인들이 낳은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보살피기까지 한다. 거기에 악기를 다루고 시를 짓는 실력도 뛰어나며 겐지의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풍류를 즐길 줄도 아는 완벽한 여인이다.


아무리 칭찬을 해도 아깝지 않을 이런 무라사키 부인이 떠난 뒤, 겐지의 모든 삶은 망가진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부인들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겐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약 1년 뒤 출가하고 몇 년 뒤 죽음을 맞는다. 무라사키 부인의 죽음이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반면, 겐지의 죽음은 제대로 된 언급조차 없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다’라는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는 첩으로 표현된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밝힌 바는 없지만, 나는 이것을 무라사키의 죽음 이후 겐지의 삶과 죽음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특히 겐지가 무라사키 부인의 장짓문을 바라보며 그녀를 회상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겐지가 다른 곳에서 밤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부인의 시녀들이 질투하여 겐지를 모른척하고 일부러 문도 열어 주지 않고 있는데, 무라사키 부인이 직접 문을 열며 온화한 표정과 말투로 겐지를 반겨준다. 그 모습을 겐지는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이 회상 장면은 <겐지모노가타리>의 그 어떤 장면보다 애련하다. 특히 겐지가 외박을 할 때마다 무라사키 부인이 혼자서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속상해하면서도 이해하고 스스로 감내하려 애썼는지를 독자들은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마음이 좋지 않을 상황에서 그렇게 먼저 손을 내미는 그녀의 성품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던 첫 번째 부인이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감내해야 했던 그 슬픔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다.


이렇듯 무라사키 부인은 어렸을 때 납치되어 남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으며 남편의 엄청난 바람기도 모두 수용하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도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을 도구로만 보았던 중세의 세태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작가가 여성이고,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캐릭터의 인생을 통해 간접적으로 당시 여성을 바라보던 그릇된 시각을 고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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