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사키 시키부 <겐지모노가타리>
세계 최초의 소설?
<겐지모노가타리>, 번역본 <겐지 이야기>는 일본 헤이안 시대 황족인 겐지의 연애사다. 그런데 그 연애라는 것이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문란하고 난잡한 것이어서 1천 년 전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작품의 구도와 문체들이 요즘 인기 있는 웹소설만큼이나 화려하고 막장 전개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인류사의 주요 고전 문학에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과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겐지모노가타리>는 해석에 따라 최초의 소설로 여겨진다. 실제로 내가 시대순으로 읽고 있는 작품들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소설이기는 하다.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서사시였다. 서사시는 인물의 내면 묘사나 장면 묘사가 약하고, 이야기의 진행 구조도 단순하다. 무엇보다 작가가 서사를 노래하는 형식으로 쓰인다. 반면 <겐지모노가타리>는 현대 소설처럼 인물 간 관계가 복잡하고 그들의 내면 묘사가 뛰어나다. 벌어지는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은유와 묘사, 화려한 수식들이 적극 사용되는 것도 특징이다. 이에 서사시에 지쳐 있던 시점에서 매우 반가운 작품이었다. 더욱이 서양과 인도 문화권의 서사시들을 보다가, 우리나라와 매우 가까운 일본 작품을 보니 등장하는 장면, 물건, 문화들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일본 헤이안 시대 성(性) 문화와 주인공 겐지의 여성 편력
특히 이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당시 일본의 혼인 문화는 상당히 흥미롭다. 귀족 여자는 함부로 밖을 돌아다니며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다. 방 안에 틀어 박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소일을 할 뿐이다. 방문을 열어놓을 때마저도 발을 쳐 둔다. 그러니 남자는 그녀에 대한 정보를 소문이나 시녀들의 묘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남자가 그 이야기들을 듣고 여자를 갖고 싶어지면, 시녀나 가족들을 통해 여자의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다. 그 과정에서 뇌물을 주고받거나, 시녀와 잠자리를 가짐으로써 시녀가 남자에게 애착을 갖게 하여 접근하는 방법도 쓰인다. 그렇게 남자가 한밤중 여자의 방에 들어가면 서로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잠자리를 갖다. 즉, 여자는 그저 가만히 있다가 어느 밤에 낯선 남자가 방에 들어오면 별 수 없이 몸을 내어주는 것이다. 관계를 맺고 날이 밝기 전에 남자는 떠난다. 그리고 새벽에 여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잠자리를 사흘 정도 하다가, 남자가 여자에게 떡을 보낸다. 이는 혼인이 이루어졌다는 표시다. 참으로 이상한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매우 자극적이다. 겉으론 점잖을 빼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인 일본의 성 문화가 이런 역사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겐지는 그런 식으로 수많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하고 다니면서, 그녀들과 아주 애매하고 느슨한 혼인 관계를 맺는다. 여인들은 겐지가 자신을 찾아 주면 잠자리를 하고, 아니라면 그저 기다릴 뿐이다. 그러다 영영 찾지 않는다면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평생 외로움과 불행 속에 살아간다.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어렵다. 몰래 이루어지는 정사라지만 대개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때문에 누구도 그 여자를 데려가려 하지 않는다. 간혹 또 다른 겐지 같은 바람둥이가 찾아올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겐지모노가타리>는 겐지가 이런 식으로 연을 맺은 수많은 여인들과 겐지의 이야기다. 이와 함께 당대의 정치적 갈등과 시대 변화도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겐지는 천황의 아들이지만 후궁의 자식으로, 황위를 물려받을 위치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누구보다 외모와 자질 면에서 뛰어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 누구든 겐지를 보는 것 만으로 황홀해할 정도로 그의 외모는 특출 나다. 그러니 여인들은 낯선 남자가 방에 들어와 자기를 겁탈하려 하면 놀라 저항하려 하다가도 겐지임을 알면 순순히 몸을 내어준다. 등장하는 모든 여인들이 기본적으로 겐지를 사랑하고 있음이 전제되기 때문에 겐지가 원한다면 대부분 그의 여인이 된다.
등장인물의 뚜렷한 개성과 내면 묘사
그럼 어떤 여인이 겐지의 연인이 되는가? 그 답은, 이 작품이 소설이며 그것도 매우 우수한 소설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등장인물(겐지)의 뚜렷한 개성과 관련이 있다. 겐지는 외모나 실력(그는 음악, 춤, 미술, 무예 등 모든 것에 능하다) 부족할 것 없는 인물이지만 유별나게도 이루기 힘든 사랑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은 천황인 아버지의 부인 후지쓰보 여어였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와 닮았다고 하여 어린 마음에 더욱 빠져들게 된 후지쓰보를 향한 겐지의 마음은 절절하다 못해 눈물겹다. 첫사랑이 아버지의 여인이자 세상의 주인인 황제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겐지는 결국 그녀를 잠시나마 손에 얻는다. 몇 차례 잠자리를 하는 데도 성공하고, 심지어 후지쓰보는 겐지의 아이를 갖는다. 하나 이 사실은 측근 몇만 알 뿐 알려지지 않고 천황의 자식으로 자라다가 결국 후일 천황이 된다.
이런 자극적이고 눈물겨운 사랑을 한 겐지가, 아무 개성 없는 여인이나 관계를 굳이 선택할 리 없다. 그는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며 거기에 빠져 눈물겨운 노래를 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듯하다. 그러니 그런 절절한 관계만 찾아다닌다. 남편이 있는 여인, 원수나 마찬가지인 집안의 딸, 절친한 친구와의 경쟁에서 이겨 얻은 여인, 멀리 타지에 두고 온 여인, 자신을 사랑하나 끈질기게 밀어내는 여인 등등 다양하다. 그는 엄청난 바람둥이이지만 그렇게 만난 여인들을 모두 진심으로 여기고 아낀다. 심지어 못생기거나 성격이 괴팍해 정이 안 가는 여인까지도 애틋하고 가련하게 여겨 정성으로 챙겨준다. 여인들이 갑자기 죽어 세상을 떠날 때도 진정으로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마음에 든 여자라면 찾지는 못해도 꾸준히 편지를 하며 챙기기까지 한다. 여인들을 내키는 대로 취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데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겐지가 천하의 몹쓸 놈으로 보이다가도, 무작정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지어 겐지는 후지쓰보를 닮은 어린 소녀 무라사키에게 애욕을 느끼고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여자로 교육시켜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원대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포부를 가지고 그녀를 거의 납치해 온다. 실제로 그는 무라사키를 친딸처럼 키우고 가르치며 결국 자신이 원하는 품성이 바르고 애정이 가득하면서도 집착하거나 엇나가지 않는 여인으로 길러내어 아내로 맞는다. 이 대목에서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떠오른다. 행동은 나쁘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수려한 문체와 필력, 그리고 인물 내면의 섬세한 묘사가 이 악당들을 애틋하고 정감가게 만들어 버린다.
이런 겐지에게 이입을 하며 읽다 보면 빼어난 외모와 배경을 가진 남자의 삶이 얼마나 화려한지 알 수 있다. 잘 생기고 혈통이 좋은 귀족이 수많은 여인들과 연애를 하는 이야기는 현대의 웹소설을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 출생의 비밀과 금단의 사랑까지 한가득이다. 그 수많은 연애소설들이 <겐지모노가타리>로부터 파생된 아류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작품에는 연애소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겐지는 그간 만난 여인들을 불러 모아 살게 하려고 하렘 그 자체를 건설하기에 이르는데, 결국 이 작품은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지라도 세계 최초의 하렘물은 맞을 것이다. 일본 특유의 하렘물이 여기서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감상이 달라진다.
이 작품을 이야기하며 극초반부에 나오는 ‘비 내리는 날의 여인 품평회’를 빼놓을 수 없다. 겐지가 어린 시절, 그와 그의 친우들이 모여 여인의 종류를 나누고 어떤 여인이 더 바람직한지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품평을 하는 장면이다. 지금이라면 여성계가 들고 일어설만한 내용이지만, 당시로서는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인 데다, 내용 자체가 매우 흥미롭다. 게다가 이 소설을 여성이 썼다는 것이 그 내용을 더욱 신빙성 있고 흥미롭게 한다. 겐지가 만나는 여인들을 이때 나온 여인들의 품평에 하나하나 빗대어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겐지모노가타리>는 작품 고유의 첩으로는 총 55첩, 번역본으로는 10권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한다. 이에 본 감상문을 나누어 작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