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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혐오에 대하여

by 믕딤

내가 언젠가 한참 모자란 스펙으로 회사에 다녀보겠다며 발을 들였을 때, 나는 사회에 섞이기 위해 나 자신이 어디까지 깎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연필을 깎고, 과일을 깎듯이 칼로 깔끔하게. 필요 없는 부분들은 잘라내면서. 그렇게 번듯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쓸모없는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쓸모 있는 부분인지 몰랐던 나는. 버려야 할 부분을 애써 고르기보다 컴퓨터 포맷 후 재설치를 하듯 아예 전체를 갈아엎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각했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을 구별하기엔 난 너무 어리고 미숙했고, 무엇보다 그런 걸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모두가 '너는 너무 늦었다.'라고 재촉하고 있는데 팔자 좋게 내 스스로를 분석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본격적으로 흠집 냈던 것 같다. 나라는 인간을 '기능'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전의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던 일들은 생산성 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며,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의 모습은 그저 허황된 꿈이었다고. 내 마음에 살고 있던 어린 소원들을 전부 쫓아내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나는 내 '낮은 지위'에 맞게 입을 다무는 법을 배우고, 분위기에 맞춰 억지로 웃는 법을 배우고, 맞서는 대신 모른 척 지나치는 법을 배웠다. 삐죽 대는 자아와 공격성을 거세당한 후 변하는 내 스스로를 보며, 때때로는 이제야 그럴듯한 사회인 같아졌구나 만족스러움도 느꼈만, 평범하게 비겁하고 평범하게 치졸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좌절감도 느꼈다.


조직 사회에 속할수록 그럴듯한 직업, 그럴듯한 취미, 그럴듯한 배경, 그럴듯한 인. 그것들이 요란한 경고음을 내며 내 삶에 쳐들어왔다. 그것들이 삶 속에서 뿌리를 내리 자라나는 순간, 나는 알량한 안심을 얻었고, 미칠 것 같은 불안을 얻었다.


끝끝내 작동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나를 성실하게 고장 냈다. 내가 나로 살지 않아야 비로소 쓸모 있는 인간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체 어디까지 려나가야 죽고, 어디까지 아있어야 사는 걸까? 얼마큼의 살을 썰어내 피를 흘려야 이 사회에 딱 들어맞게 반듯해지는 걸까?



드라마를 봤다.


'미지의 서울'이라는 드라마였다.


어떤 여자가 이닥치는 삶을 견딜 수가 없어서,

몸을 부러뜨려서라도 삶을 멈추고 싶어서

저층 아파트 베란다서 뛰어내리려는데

쌍둥이 동생이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너 진짜 까딱하면 죽을 뻔했어, 진짜 죽을 뻔했다고."


"바보야. 그걸 알면 손을 놔야지, 왜 같이 떨어져?"


"어떻게 놔. 내가 니 손을 어떻게 놔."


나는 엉엉 울며 대화를 나누는 쌍둥이 동생과 언니가,

한 사람이 둘로 분리되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살리고자 하는 나와, 나를 죽이려고 하는 나.


그 둘의 대립 같았다.

그래서 그 장면이 유난히 애달팠다.


"눈물 나는 이유를 알았으니까, 다음에 퇴사할 때는 울지 않겠네."


내 구질구질한 퇴사썰을 듣고 친구가 말했다.


"나도 그러지 않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다음번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환상 같은 말이라는 걸 안다.


내 다음 사회생활도 휩쓸리고, 무너지고, 이해할 수 없고, 여전히 미궁이고, 혼란스럽고, 부아가 치밀 테다.

조절할 수 없는 눈물이 날 테고, 가끔은 미치겠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절벽이고 어디까지가 길인지도 모르는,

나 같은 바보에게도 다정한 세상이 있기를 바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까?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그저 꾸역꾸역 형편없고 초라한 나를 견딜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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