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많이 기대고 의지했던 사람의 연락처를 삭제했다. 사람과의 인연을 무 자르듯 잘라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저 좋은 말로 언젠가의 다음을 기약하며 멀어지기로 했다. 고마웠다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내 속에서는 언제나 아슬아슬했던 줄이 탁 하고 끊어졌음을 느꼈다. 정들었던 이 사람을 내가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함께한 지 2년이었다. 인연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이 사람을 미워하는 걸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했던 2년이었다.
나는 그동안 그가 가여웠었다. 오만하지만 정말 그렇게 느꼈다. 언젠가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가엽게 느껴지고, 동정하게 되고, 안쓰럽게 느껴진다면 그건 사랑의 어떤 형태라고 말이다. 내 감정이 그토록 괴로웠으니, 사랑이라고 부를 만했다. 깊게 미워하는 감정은, 사랑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던가? 밉다는 말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어물쩡 넘어갔었지만 말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했던 것은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서 숨기고 싶은, 그러나 이끌어주고 싶은 연약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언제나, 기꺼이 내게 약한 모습을 내보였다. 내 어깨에 기대었다. 하지만 자기혐오가 짙었던 나는 그에게서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동정과 동시에 혐오를 느꼈다.
그는 언제나 내가 강하다고 했다. 아니, 난 강하지 않아. 그럼 그는 말했다. 적어도 나보다는 강한 것 같아. 그럼 내 눈살이 팍 찌푸려졌다. 내게 기대고 칭얼대려는 작전같이 느껴졌다. 나는 나보다 약한 그를 품어주어야 하고, 내 약함은 눈치껏 감추도록 말이다. 그가 내게 풀어내는 푸념에 나는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사실 너무도 지쳤지만 그가 내게 기대고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꼭 내가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끊어낼 수가 없었다.
내 혼란은 그의 혼란보다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직 내 글 안에서만 통곡했다. 타인의 앞에서는 무너지지도, 불행해지지도 못했다.
그런데 타인들은 내 앞에서 그토록 쉽게 무너져 울기 일쑤였다. 내가 그래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사람모양의 형태를 한 돌인 것처럼.
어느 순간 나는 고민 들어주는 인형 역할의 쓸모에 중독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게 감정을 쏟아버리고 후련해하는 그들의 만족감을 흡족해했다. 나는 나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그에게 기대었는지도 모른다.언젠가 그는 내가 정말 하늘의 별인 것 마냥, 자신을 구원해 달라며소원을 빌기도 했다(어이 x).이러다간 정말 별이 되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나는 이제 이 관계를 그만하려고 한다고 처음으로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렇게 연락처까지 모두 지우고 뒤돌아섰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서 나를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나대로 살아왔고, 그는 그대로 살아왔다. 나는 결코 그를 구원해 줄 수도, 아이처럼 돌봐줄 수 없었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호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냉정하지만, 나는 내가 우선이다.
그 관계에서 몇 걸음 빠져나와, 주변을 돌아보니 내 주위가 엉망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집은 대청소가 필요했고, 밀린 빨래도 해야 했다. 전보다 훨씬 글이 쓰고 싶어졌고, 바다도 보고 싶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일보다, 훨씬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껏 중독된 것을 끊었지만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변화가 찾아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