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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크부부의 난임극복기

#1. 우리는 딩크족이었습니다.


“네 사주에는 자식이 안 보이네”



 과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과학을 좋아하면서 불가지론자가 돼버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1년에 한 번씩 철학관을 간다. 신점을 보고 싶지만 그건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는 기분이라 한두 번 문을 두드리고 난 후에는 사주팔자를 풀이해 주는 철학관에만 찾아간다. 지친 작년을 보내며 올해는 운이 좀 풀릴까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사주풀이를 듣다 보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자식 운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내 팔자에는 자식이 들어오지 않으니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궁이 안 좋았던 건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먼 지방으로 유명한 한의원에 갔을 때부터 알게 되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팬티에 묻어 나온 냉이 신경이 쓰였던 부모님이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시골의 한 한의원 앞에서 나를 위해 줄 서 기다리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한의사도 나의 자궁을 건강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는지 그 이후로도 냉과 주기적인 가려움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내 팔자에 자식이 보이든 안 보이든, 자궁이 건강하지 않든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함과 동시에 혐오했으며 이 세상에 반항심이 최고조였기에 자식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에 수긍하며 살겠다는 패자 선언문과 같았다. 그러나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다짐은 안타깝게도 28살 이른 나이에 깨져버렸다. 비혼주의자였던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일 먼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아이를 가질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나의 다짐이 나의 변덕으로 한순간에 변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콩깍지가 벗겨져 이혼 위기가 찾아온다는 7년 차를 넘긴 후 10년 차가 되어서야 나와 남편은 임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10년 차에 임신을 생각했다기보다는 만 35세, 노산으로 넘어가는 시점이 되어서야 진지하게 임신과 출산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곧 너는 엄마가 될 기회가 박탈 당할거야”라는 경고문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발 정답을 알려주세요”라고 외쳤지만, 자식을 가진 사람은 딩크족 부부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딩크족 부부는 자식을 가진 사람들 마음을 알 수 없기에 그들에게 답을 달라는 것은 어쩌면 오답을 포함한 정답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혼 9년 차까지는 딩크족이었으나 10년 차에 임신을 고민하고 결심했고, 현재 자연임신이 되지 않아 시험관 시술을 앞두고 있다. 인간의 기억과 사고는 늘 상황에 맞춰 변하기 때문에 지금 글을 쓰는 것이 내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시점이 될 것이다. 임신이 된다면 기쁨에 취해 이전의 나를 잊을 것이고,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합리화에 따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신을 원하면서도 딩크족의 삶에 만족하는 이 시점이 유일한 중첩 상태일 것이다.


 '임신과 출산을 하면 어떨까'라는 상상과 현실적인 문제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내가 나를 응원하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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