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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음표 Sep 29. 2024

합리화하고 싶을 만큼 끔찍한 고통

꾸역꾸역 신고하고 고소장을 접수하기까지

내 뒤에 있던 사람이 열차에 타면서 등을 손으로 쓱 만지고 지나갔다. 나도 같이 들어가면서 당했기 때문에 누군지 알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실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긴가민가했다. 어느새 상대의 의도를 합리화하고 있었다. 


지나가다 그랬겠지. 사람도 많은데. 


딱 잘라서 구별할 수 없는 차별을 당한 경험이 쌓이면서 미묘한 차별을 잡아내는 방법을 익혔다. 긴가민가한 일을 합리화해야 한다면 이미 차별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차별만이 줄 수 있는 깊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합리화하려고 애쓰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역에서 내렸을 때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 신고를 결심했다.


성추행당한 역으로 바로 돌아갔다. 교통카드 사용기록애서 승차 태그 시간을 알아냈다. 역무실에 가서 범죄 피해를 당했다고 말하고 열차 번호를 확보했다. 모은 정보는 모두 핸드폰 노트에 정리했다. 폰이 중간에 방전되지 않게 역에 있는 콘센트에서 핸드폰을 미리 충전했다. 어떤 정보를 모아야 하는지 알고 척척 움직인 데는 이유가 있다. 이미 당해보고 신고까지 해봤다. 그래서 우리나라 경찰이 성폭력 피해자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빈틈없이 정보를 모아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112에 전화했다. 경찰들이 나타났다. 유동인구가 많은 역 앞 탁 트인 공간에서 경찰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설명해야 했다. 사람들이 경찰차만 보고 내가 범죄자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내 평판을 따질 여유도 없었다. 여자 경찰 1명과 남자 경찰 1명이 왔다. 정리한 노트를 보여준 게 도움이 되기는 했다. 남경 2명이 오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남경이고 여경이고 내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선생님도 긴가민가하지 않냐"고 해서 "성폭력을 확신하지 않았으면 왜 신고했겠냐"고 설득해야 했다. 우리나라 경찰이라는 사람들은 성별을 떠나 피해자 중심으로 성폭력을 바라보는 관점을 갖추지 못했다. 당한 사람이 성적인 혐오감을 느끼면 성폭력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울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는 4월에도 성폭력을 당해서 경찰을 부른 적 있다. 그때는 지구대에서 진술서를 쓰고 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찰서 (지구대 말고)로 가서 고소장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가야 했던 관할 경찰서에서 수사관들에게 무고 운운하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적이 있어서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번아웃된 몸과 정신을 질질 끌고 관할 경찰서를 찾아갔다. 시간이 지나면 고소장을 접수시키는 것조차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3번이나 피해 사실을 설명했다. 112에 신고할 때 한 번. 경찰이 출동했을 떄 한 번. 관할 경찰서에 가서 한 번. 피해자가 처음에 정보를 제공했으면 나머지 절차는 경찰 내부에서 정보를 공유해서 진행하는 게 맞지 않나? 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만드는 걸까? 허술한 제도 때문에 성폭력을 신고한 피해자들이 쓸데없이 두 번 세 번 네 번 고통받아야 한다. 아마 수사관이 배정되면 내가 이미 경찰에게 말한 내용을 또 물어볼 것이다. 이러니 사람들이 당하고도 신고를 망설이지.


저번과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니까 겁이 나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진상이라고 생각해서 상위 기관으로 폭탄 돌리듯이 떠넘겼나? 정보를 너무 잘 준비해 와서 무고범이라고 생각했나? 어떻게 이런 정보를 다 준비해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이렇게까지 묻지는 않았지만 이런 의심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렇다고 정보를 덜 준비해 가면 내가 정보를 캐올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저번처럼 "너무 오래 지나서 cctv 영상이 삭제되었다"고 우길 텐데? 물어봐도 답해줄 리 없는 질문들이었다. 그걸 알아서 더 무섭고 더 괴로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보복당할까봐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요즘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경찰을 상대할 때는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당장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도 "저번에는 지구대에서 진술서를 받아줬는데 이번에는 왜 다르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전에도 성폭력 신고 경험이 있다고 하면 내가 신고한 상황을 가볍게 여길 것 같았다.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계속 성폭력을 당한다는 식으로 가스라이팅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입술까지 올라온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경찰이 cctv에서 나를 찾는 데 필요하다면서 내 앞모습과 뒷모습 사진을 찍어갔다. 올해 봄에도 같은 이유로 사진을 찍어갔다.정작 경찰서에 가서 머그샷을 찍혀야 할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잡힌 적 없다. 피해자인 나만 머그샷 아닌 머그샷을 계속 찍히고 있다. 이러다가 경찰들이 본의 아니게 물음표의 20대 성장 앨범(...)을 찍어줄지도 모른다.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고소장을 접수하고 나오자마자 억지로 눌러두었던 고통이 몸을 찾아왔다.  경찰서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분식이 당겼다. 그런데 고소장을 접수하고 나오니까 입맛이 달아났다. 메스껍기만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목과 몸통 사이에 있는 뼈인지 근육인지가 고장난 것처럼 아팠다. 앉아서 갈 자리가 간절했지만 30분쯤 버스에 서서 가면서 시간을 버렸다. 평소처럼 폰을 보거나 책을 읽기도 어려웠다.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메스꺼웠다. 잠도 오지 않았다. 웹툰을 봐도 별로 재미없었다. 사실 집에 무사히 들어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고소장을 접수하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은 다 해봤다. 힘들어도 최대한 빠르게 대응했기 때문에 오늘 안에 밟아야 할 절차를 다 밟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력하게 당하면서 혼자 속앓이하는 굴욕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칠 뿐이다. 


오늘 성폭력을 신고하고 고소장을 쓰기 위해 한계를 넘어선 체력과 정신력을 걸어야 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당할 수 있는 일이다. 당할 때마다 오늘처럼, 어쩌면 오늘보다 더 고통스럽게 싸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당하는 족족 신고할 시간적인 여유라도 있었지만, 바빠지면 그마저도 어려워질 것이다. 지쳐서 더이상 싸울 수 없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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