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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roboros May 23. 2024

우울증인줄 알았는데 조울증이래 2

마주하다

1.

조울증을 진단받다.


 나는 대학시절 정신병원에서 실습을 했다. 이후에는 정신요양원에서 근무를 했고 지금은 정신과 관계 없는 전혀 다른 시설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정신과 관련된 공부를 해왔다. 그렇지만 나는 의사나 정신건강전문가가 아니므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겪은 일을 쓴 수기이다.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원에서 가장 종잡을 수 없던 환자들이 조울증, 바로 양극성장애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기분이 양극단을 오가며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를 만큼 기분이 수시로 변화한다. 그래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환자들이 바로 양극성장애 환자였다. 나는 양극성 장애 환자들을 돌볼때 정말이지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 빠지곤 했다. 


 아직도 양극성 장애를 진단 받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 날은 6월이었고, 하늘이 파랬고, 세상 모든게 나만 빼고 잘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나만이 부조화스러운 이질적인 무언가가 되어 있는 느낌이라 세상 모든게 삐딱하게 보였다. 정신건강과 관련된 일을 했었고 그에 대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양극성 장애라는 사실을 확인 한 후에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정신병원이나 정신요양원에서 꾸준히 일을 해 경력을 쌓고 싶었는데 '나 자신이 환자인데 환자를 돌봐도 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앞으로의 내 커리에도 빨간불이 켜진것처럼 느껴졌다. 


 ‘양극성 장애는 기분장애 중 예후가 가장 나쁜 질환이다.’ 같은 가장 안좋은 문구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이럴 땐 오히려 많이 알고 있는 것이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집으로 달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건강 관련 책들을 샅샅이 뒤졌다. 책에는 어떤 해답이든 있지 않을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치만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안좋은 말 투성이였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기는 개뿔 책은 나에게 ‘너는 망가진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를 어떤 카테고리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 카테고리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훈장이되기도 하고 낙인이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낙인이었다. 정신병은 훈장이 될 수 없었다. 정신병은 그냥 정신병이다. 특히 나는 진단 받았을 당시 환청까지 경험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기에 그 좌절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하는 구나’라는 생각에 온 몸이 무기력감에 빠져들었다. 진단 자체가 나에게는 일종의우울삽화였다.


 진단을 받은 다음날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직장에서 사건이 벌어져 이중의 우울삽화를 경험하자스트레스를 감당 할 수가 없게 된 나는 한 달간의 휴직계를 내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씻지도, 먹지도 않고 잠만 자며 한 달을 보냈다.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죽어버릴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살사고를 하며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살사고를 경험했지만 진단 이후의 자살사고는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구체적인 계획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를 실행하려는 시도도 몇번이나 했었다. 이 시기의 나는 운전도 거의 하지 않았다. 어쩌다 외출 할 일이 생기면 걷거나, 죽어도 싫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차를 타고  가다 밖에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에 반하듯 '양극성 장애 환자'인 나만 혼자 회색빛인듯 했다. 빛나는 풍경들이 짜증났다. 그래서 운전을 하고 가다가 핸들을 꺾어 어딘가로 추락하거나, 어딘가를 들이박는 충동을 강하게 경험했다. 실제로는 겁이 많아 시도하지 못했지만. 나는 어떻게해서든지 죽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도대체 나는 왜 이런 병에 걸렸나?'를 생각해 보았다. 양극성 장애는 유전성이 강하다. 부모 중 한명이 양극성 장애일 때, 자녀에게서 양극성 장애 발생 확률이 크게 증가한다. 또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약 80%의 확률로 조울증을 공유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이란성 쌍둥이에서는 16% 가량의 공유율을 보인다.(Goodwin, F. K., & Ghaemi, S. N. (1999). The impact of the discovery of lithium on psychiatric thought and practice in the USA and Europe. Australian and New Zealand Journal of Psychiatry, 33, S54–S64.)


 나는 크게 확신 할 수 있었다. 내 정신병은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나의 부모님은 두분다 우울증을 크게 앓았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양극성 장애가 의심되었었다. 물론, 가족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정신질환이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 너무나도 유전일 것이라는 확신의 증거가 눈 앞에 있었다. 부모님을 향한 원망의 감정이 솟아날 때 쯤, 이미 돌아가신 분과 홀로 외로이 남아 계신 어머니를 탓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왜?'라는 물음에 생각하기를 멈췄다. 내가 알고 있는 얕은 지식을 끌어 모아 향한 곳이 겨우 '부모님 탓하기'라니, 나의 지식화는 그저 핑계를 대고 부정하고 싶은 도구였을 뿐이다.


 모든 정신장애가 그렇듯,  양극성 장애는 유전적, 사회적, 정신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병한다. 사회적, 정신적 요소도 무시 할 수 없었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삽화가 일어나기 전 스트레스가 될 만한 사건을 더 많이, 더 자주 경험한다 이것을 '삽화' 혹은 '트리거'라고 한다. 나의 경우 어린시절부터 반복된 우울 삽화가 원인이된 것은 분명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울삽화로 인해 자극을 추구하는 성향까지 생긴것 같다는 짧막한 검사결과 보고서를 보고 웃었다. 내가 첫 우울 삽화를 진단 받았을 때는 열 네살이었다. 당시 성폭행을 당해 부랴부랴 찾아간 병원에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 뒤로도 왕따, 학교에서의 부적응 문제, 가정불화, 연인과의 이별, 친구들과의 불화 등을 수도없이, 연속적으로 겪으며 '불행한 나'를 정상으로 생각하고 나의 불행스토리를 즐겁게 여기기 까지 했었다. 불행하지 않으면 '지루하다'느낄 정도였다. 양극성 장애를 진단 받기 직전에는 부모님으로 부터 생긴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직장 스트레스, 연인과의 불화까지 삼중고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빼도박도 못하게 우울삽화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연인과 싸우지 않았더라면? 왕따를 당하지 않있더라면? 학교에서 자퇴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죽지 않았더라면?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원망만 늘어갔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건 지나간거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다. 당장 나에게는 더 큰 문제가 놓여져 있었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에 휩쓸리기 보다 '내가 선택한 불행'에 몸을 맡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울에 반발하듯 나의 경조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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