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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사람

잔잔히, 분위기가 고요하고 편안하게

by 유진 jjinravel
이 친구는 말을 참 잘해
저 친구는 옷을 참 잘 입어!
얘는 참 조용하게 웃긴 친구야


"음.. 나는 어떤 특징이 있는 사람이지..?"


저는 스스로를 미지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특별히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 친구들 사이에서 조용한 편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내성적인 편도 아닌 사람. 존재감이 크진 않지만 언제나 잔잔하고 묵묵하게 나의 자리에 있는 사람. 사실상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죠.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다'라고 정의 내리기가 참 어려웠어요. 그만큼 흐릿하고도 애매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걷고, 밥을 먹고, 여행을 다니면서 문득 깨달았어요. 조용하고 잔잔한 것도 나의 특징과 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바다에도 크게 넘실거리며 부서지는 파도가 있고, 잔잔하고도 고요한 물결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길을 걸을 때, 책 한 권을 읽을 때, 글을 쓸 때, 말없이 풍경을 바라볼 때 - 그 순간의 저는 다른 어떤 모습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죠.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얼마즈음 더 보냈을까. 혼자 여행하며 제가 고르는 것들,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곳들, 나의 감정이 요동치는 지점 등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무게 중심이 점차 저에게 기울면서,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모든 사람이 선명한 색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죠. 어떤 마음은 짙고 강렬하게 남고, 어떤 마음은 부드럽고 잔잔하게 번지더라고요. 저는 후자에 가까운, 즉 잔잔한 흐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잔잔함을 애정하는 사람의

일본 사가현 혼자 여행기.


시작합니다.



사가현


특가 비행기 티켓에 냅다 표부터 끊었던 일본 사가 여행. 그저 후쿠오카와 가까운 소도시라는 정보만을 가지고 2박 3일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1시간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부산보다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해외라고 신났던 기억이 납니다. 이전에 도쿄와 근교의 소도시(사와라)를 간 적은 있지만, 애초에 소도시 여행을 목적으로 혼자 떠나보는 건 처음이기도 했거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용기 내길 잘했습니다. 일본의 소도시는 생각 이상으로 고요했고, 사람들도 친절했어요. '하루 끝의 마무리는 무조건 온천'이라는 자체 슬로건 아래 떠난 여행. 꽤나 행복했습니다. 사가현 중에서도 온천으로 유명한 다케오온센 역 부근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기에-



1. 에미 카페 (emi cafe)

역시 이번에도 먹는 것으로 시작하는 여행기. 다케오시의 식당 중에 제일 가보고 싶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1000개가 넘는 리뷰임에도 무려 구글 평점이 5점이었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식당 앞에 자전거를 대는 것부터 친절하게 알려주셨어요. 그러더니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메뉴를 하나하나 소개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일본 소도시에서 한국어라니. 생소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에 저도 신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직도 그 질문이 생각이 나요. "여기 혼자 오셨어요...? 왜...." 하하.


저는 살짝 매콤한 카레 덮밥 메뉴를 시켜서 오렌지(?) 주스와 함께 야무지게 먹었는데요. 이곳은 꼭 추천드리고 싶네요. 내부 인테리어부터 정겨웠던 직원분, 그리고 맛있는 음식까지. 혼자 왔음에도 부담 없이 공간 자체를 즐길 수 있었어요. 직원 분께 감사한 마음에 일본어 한마디를 달달 외워 나오면서 자신 있게 외치고 왔답니다. "고치소우사마데시다! (잘 먹었습니다)"



2. 타케오시 도서관

우리나라의 별마당 도서관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도서관. 그래서 그런지 더 궁금했던 공간입니다. 내부엔 여러 분야의 서적이 가득 차있고, 스타벅스도 함께 있어 커피와 함께 공간을 즐기는 분들도 많았어요. 저 역시 말차라떼 하나를 주문해 바깥 테라스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을 평화로이 읽었답니다. 사람은 꽤 많았지만, 서로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보여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던 곳.

(*사진 찍을 수 있는 포토스팟이 정해져 있어요)



3. 다케오 신사 & 다케오 녹나무

타케오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근처 유명한 신사가 있다고 해서 슬그머니 올라가 봤어요. 신사와 울창한 숲을 지나면 보이던 3000년 된 녹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잘 알지는 않지만, 토토로 영화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그런 나무였달까요. 세월의 흐름과 흔적이 보이는 무언가를 좋아하는데, 제게 이 나무는 딱 좋은 사색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염없이 구경하고 바라보고, 세월의 흐름에 압도도 당하고 왔네요. 나무를 보러 가는 길목에선 신비한 곳에 들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죠.



4.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던 순간들

머물렀던 호텔에서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조금 멀리 있는 '미후네야마 라쿠엔'이라는 자연 명소와 '케이슈엔' 녹차밭도 다녀오며 골목골목 누비고 다녔죠. 혼자 여행에 자전거라는 요소 하나만을 더했을 뿐인데, 내가 이곳에 온전히 머물러보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낯설지 않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달까요. 그리고 그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낭만적이기까지 했죠.


사실 재작년만 해도 자전거를 아예 못 탔는데요. 못 탔다기보다는 시도를 안 했다고 하는 게 맞겠습니다. 약 10년 전 자전거를 타고 크게 넘어진 기억이 있었거든요. 그 기억이 저를 꽤 오랜 시간 가두곤 했는데, 생각보다 10년의 간극이 한순간에 깨지기도 하더군요. "그냥 타봐"라는 친구의 한마디에 어느새 페달을 돌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고, 그 순간이 꽤 짜릿했습니다. 그렇게 여수에서, 대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일본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그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닐까 싶네요.



5. 센트럴 호텔 다케오온센 에키마에

깔끔한 방과 화장실, 자전거 무료 대여, 그리고 무료 온천까지.. 가성비와 힐링이 가득했던 제 숙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루 끝의 마무리는 무조건 온천'이라는 자체 슬로건을 실현시켜 준 곳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역에서 도보 1-2분 거리라는 것.


가져온 혼여행 노트에 제 감정도 적고, 좋았던 순간들도 남기고, 받은 티켓들도 붙이며 이리저리 시간을 보냈습니다.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지름길은 단언컨대 '기록'이 아닌가 싶어요.



6. 花々

혼자 여행을 가면 한국이든 어디든 혼술 해보는 경험을 좋아합니다. 술을 좋아한다기보단, 지역마다 다른 동네 가게의 편안한 분위기가 좋다고 해야 될까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녀왔는데,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게 좀 아쉽더라고요. 일본어를 할 수 있었다면 가게 사장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그래도 계란말이는 예술이었습니다. 애피타이저로 주신 반찬들도 하나같이 감칠맛이 좋았고요.



7. 구.코가가

무료로 일본 근대식 가옥을 둘러볼 수 있는 곳. 제가 방문했을 땐 청소하는 분만 계셔서 목례를 나누고 들어가 구경을 했답니다. 제가 갔을 당시엔 10월 가을 즈음이었는데, 반팔을 입을 만큼 날이 따스해서 아직 푸릇한 여름의 모습을 띠고 있었어요. 골목골목 걸어 다니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곳이었는데, 이 부근 골목들이 다 아기자기하고 걷기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퍽 아름답기도 했던.



8. 미루 코야나기

사가현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시시리안 라이스'가 있다고 하여 찾아온 식당. 레트로한 경양식 식당의 분위기가 꽤 정겨웠고, 회사 점심시간에 방문한 것처럼 보이는 현지 분들이 많았습니다. 시시리안 라이스는 규동 위에 양배추와 오이, 그리고 마요네즈(?) 소스가 올라간 느낌이었어요. 느끼한 걸 잘 못 먹는 제게는 시시리안 라이스가 쉽지는 않았지만, 한 번쯤 먹어볼 만했습니다. 그런데.. 양이 정말 많습니다. 정말로..



온천, 자전거, 맛있는 음식, 친절한 사람들, 잔잔한 분위기는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데 한없이 충만했습니다. 나 자신을 비우고 다시 좋은 것들로 채워내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이번에도 역시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러한 마음은 제가 저를 좋아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오늘은 일본 사가현에 차려둔 제 고요를 소개드려 보았는데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의 마음도 한껏 평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해 보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게 없어서, 내가 나를 모르겠어서, 잔잔한 내가 가끔은 지루하다고 느껴져서 고민인 분들께도 자그마한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요. 내가 나인 것에도 충분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내가 고른 잔잔한 것들로 온 마음을 채울 수도 있다는 것. 그걸 꼭 말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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