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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Jan 31. 2021

크로#27.두브5:라구사 통치자 렉터는 진정한 공복!

'사적인 일은 잊고 공적인 일에 전념하라'는 렉터의 근무수칙

로자 광장

스폰자 궁 앞에서 스트라둔이 끝나고 로자 광장이 펼쳐진다. 궁 옆의 작은 문은 항구로 나가는 출구이다.

종탑은 1444년에 세워진 35m 높이로 구시가지 어디서나 보인다.

그 앞에 ‘오노프리오 小 분수’가 있다.

로자 광장 한가운데 ‘올랑도의 기둥’이 있고 광장을 사이로 성 블라이세 성당과 스폰자 궁이 마주한다.

1444년에 세워진 35m 종탑
종탑 왼편 아치 출구를 통해 항구로 나간다.
화면 중앙의 '소 오노프리오' 분수
왼쪽 하단 롤랑의 기둥과 성 블레이세 성당

스폰자 궁 앞에서 직진하면 왼쪽에 렉터 궁, 길 끝에 성모승천 대성당이 지붕에 돔을 얹고 옆모습을 보이며 서있다.


어제 비에 젖어 있던 광장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오간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관광객들의 원형 대열도 눈에 띈다.
    

맨 왼쪽에 小 오노프리오 분수,  중앙의 돔이  대성당(성모승천 성당), 오른쪽은 성 블레이세 성당

천년의 도시 수호 성인 블라이세(St. Blaise)와 두브로브니크인의 축제

스폰자 궁에서 올려다본 건너편의 성 블라이세 성당 맨 꼭대기에는 머리에 황금빛 주교관을 쓴 조각상이 서있다.

아르메니아의 주교였던 성 블라이세 (혹은 서기 3세기경 카파도키아(Cappadocia) 세바스테(Sebaste)의 주교이자 의사로 활동했다고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순교했다. 316년 2월 3일로 추정한다.

그리고 약 600년 후에 두브로브니크에서 성 블라이세에 대한 숭배가 시작된다.


10세기, 두브로브니크의 한 신부의 꿈에 성 블라이세가 나타난다. 성인은 자신이 이 도시를 보호하고자 천국에서 보내진 사람이라며, 베네치아 사람들이 계략을 써서 두브로브니크를 정복할 계획이라고 경고해주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를 침략하기 위해 정탐하러 온 베네치아의 위장 선박을 주민들은 친절하게 대했는데 그들의 진짜 속내를 성인이 신부의 꿈속에 나타나 알린 것이다. 다행히 이를 통해 도시는 침략을 면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문헌에서도 이 일이 언급된 시기에는 두브로브니크가 정복된 적이 없다고 한다.


이후 성인은 이 지역의 수호자로 여겨지면서 12세기에 마침내 도시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수호성인에 대한 두브로브니크 인들의 사랑은 전통이 되어, 그의 축일 2월 3일을 경배하는 성 블레이세 축제를 열기 시작하였다. 이 의식은 적어도 1190년부터 시작되었다.

 ‘성 블라이세의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시 구시가지에서 거행되며 '두브로브니크시의 날'이 되었다.  

축제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크로아티아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는 도시의 수호성인을 경배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으며 성 블라이세는 그 수호성인 중의 한 명이지만, 오직 두브로브니크에서만 수호성인에 대한 경배가 문화·인류학적 차원으로 고양되었다는 평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성 블라이세는 유럽 전역과 세계 곳곳, 그리고 페루·쿠바·폴리네시아·미국·일본 등지에서도 경배를 받는 성인이라고 한다.)


성 블라이세 성당

성당은, 1368년 시가지 중심에 로마네스크 형식으로 성 블라이세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되었다. 그 후 대지진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세기 초에 베네치아 건축가, 마리노 그로펠리(Marino Gropelli)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성당 외부 정면의 가장 높은 곳에 금빛 주교관을 쓴 성 블라이세 조각상이 서 있다.

10세기에 성 블라이세를 꿈에서 만났던 신부의 묘사대로 '주교의 관을 쓰고 주교의 지팡이를 든 긴 수염의 노인'모습다.

성인은 왼쪽 어깨에다 금빛 주교봉을 기댄 채로 지진 나기 전의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모형을 들고 서 있다. 도시를 지켜준다는 의미라고 한.

들고 있는 두브로브니크 모습은 1667년 대지진 이전의 모습이기 때문에 구시가지 고증자료로 이용될 만큼 중요한 유물로 간주된다고 한다.


이렇게 성 블라이세는 천여 년에 걸쳐 두브로브니크를 지키고 있다.

성 블레이세 성당 지붕의 성 블레이세 조각상. 구시가지를 들고 있다.
성 블레이세 성당 앞에 서있는 오른쪽 롤랑의 기둥
성 블레이세 성당 (성 블라호 성당)

성 블라이세 성당으로 나이 든 관광객들이 미사를 드리러 들어간다. 행사가 열릴때면 성당의 계단에서 진행을 한다는데 오늘은 다리 아픈 여행자들의 의자가 되어다. 나도 성당 계단에 앉아 아픈 다리에 잠시 휴식을 준다.      

성 블레이세 성당 내부
롤랑의 기둥 기단에 앉아 쉬는 관광객들

롤랑의 기둥 (혹은 오를란도르, 올란도:Roland) 기둥

광장 한가운데 롤랑의 기둥이 있다.

롤랑은,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조카이자, 12명의 성기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맹렬히 영토를 넓히던 샤를마뉴는  778년 에스파냐 원정을 접고 돌아가던 길에  롤랑이 이끄는 후군은 적의 약속을 어긴 공격으로 롤랑과 함께 전멸하였다.

비록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롤랑이지만 그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세력을 보호하는 상징으로 추앙되어 서사시로 탄생하는데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주군을 보좌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롤랑의 노래’가 된다.


이렇게 용맹한 기사의 무훈시로 탄생한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는 11세기 무렵에 유럽 전체로 퍼져 애송되었다.

단지 에스파냐 공략에 나섰던 샤를마뉴가 공성전 무기를 가져오지 못해 전의를 접고 다른곳으로 이동하는 중에

후위로 이동하던 롤랑의 부대가 바스코의 공격으로 도륙수준의 참패를 당하고 무너졌다는게 실상.

어쨌던 각색된 롤랑의 노래가 15세기에 두브로브니크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두브로브니크는 수세기 동안 비잔틴 보호 아래 있었는데 지중해가 사라센에 의해 포위당한 상태였다.

이들은 롤랑의 정신을 높게 평가하여 동상으로 제작하였다.

동상은 1418년 조각가 안툰 두브로브차닌과 보니노 디 밀라노에 의해 제작되었다.

롤랑의 오른손에는 전장에서 사용했다는 명검 '뒤랑달'이 들려있다.

석상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손까지의 길이 51.2cm가 과거 상거래의 표준길이 1엘(Ell)로 쓰였다.

동상이 서 있는 로자 광장은 상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였고

스폰자 궁전은 세관이었다. 또한 광장은 라구사의 중요한 법령 및 평결을 발표하던 곳이기도 했다.

팔 길이 반을 길이의 척도로 사용한 것은 옷감을 잴 때 팔을 접으며 재기가 쉬웠기 때문이라고도.    

검을 들고 서 있는 롤랑

렉터 궁전      

성당과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렉터 궁전은 라구사 공화국의 행정 중심 건물로 통치자의 집무 공간이었다. 루자 광장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건물이다. 궁전 전면에는 기둥이 늘어서 있고 석조 벤치도 보인다.  

원래는 고딕 양식 궁전이었으나 1435년 첫 번째 화약 폭발로 파괴되어, 오노프리오 데라카바가 후기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또 한 번의 1463년 대형 화약 폭발과 1667년 대지진 후, 17C에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었다.     

렉터 궁전은 집무실, 무기고, 지하 감옥 등으로 이뤄졌었으며

현재는 시의 문화 역사박물관이 있어 16세기부터 19세기 라구사 공화국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법정과 감옥, 무기고, 2층에는 화폐와 문장, 렉터의 집무실 등이 있다.

내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 기간에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궁전이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궁전 안뜰에는 1628년에 제작된 미호 프라켓 흉상이 있으며  그는 사후에 재산을 기부하여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공화국의 통치자 렉터는 진짜 公僕, Real Public Servant?

12세기에 라구사 사람들은 렉터(Rector)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을 채택하였으며, 이 궁전은 그들의 재임기간 동안 공무를 보던 장소라고 한다.

의미롭게 생각되는 것은, 렉터는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문 위에 있다는 글귀, “obliti privatorum publica curate”

사적인 일은 잊고 공적인 일에 전념하라라는 뜻이라니 오늘날의 공직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名文 중 최고인 듯하다.


말 그대로 공직자의 역할이 ‘Servant’ 임을 엿보게 하는 이 글귀는 최고 통치자의 임무가 뚜렷하고 영향력 범위에 한계가 있으며, '권력의 유'가 아닌, '봉사의 책무'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으로 읽힌다.

몇 백 년 전 라구사 공화국의 정치 체계가 사뭇 의미롭다.

‘정치는 시대와 병행하여 점차 발전하고 있지만않다 ’는 사견을 굳다.


공사 중인 이곳에 언제 다시 와서 들어가 볼 수 있을는지... 기약 없는 희망 하나 추가하며 자리를 뜬다.        

렉터 궁전. 현재는 시 문화 역사박물관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성모승천 대성당)     

지붕 가운데 돔이 자리하고 가장자리에 조각상이 늘어서 있다.

7세기에 비잔틴 양식으로 처음 지어져 성모승천 대성당(The Cathedral of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Mary)으로 불리었다.

영국의 사자왕이 1192년 십자군 전쟁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다가 난파를 당해 로크룸 섬에 조난당했을 때,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2~14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1667년 대지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대성당의 돔은 이후 1672년부터 1713년까지 두 명의 이탈리아 건축가가 로마-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성당 안 보물실에는 두브로브니크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St. Blaise)의 유물, 두브로브니크의 금 세공사가 만든 금 세공품이 보관되어 있으며, 금으로 된 작은 보석상자에는 블레이세 성인의 유골과 발이 보관되어 있다. 이에 대한 안내글이 성당 내부에 붙어있다.

라파엘로의 '옥좌 위의 마돈나'와 티치아노의 '성모승천' 그림이 있다.

성모승천 대성당 정면
성모승천 대성당 측면
성모승천 대성당 안의 안내판
성모승천 대성당의 제대화

군둘리치 광장

렉터 궁전의 정면에서 보이는 길로 접어들면 군둘리치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 서있는 동상은 이반 군둘리치의 상이며 그는 16-17세기 시의회 의원이었으며 시인이었다.

특히 그는 크로아티아 표준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동상 하부 4면에 그의 작품의 주요 모티브를 형상화한 릴리이프가 있다.

왕위에 앉은 라구사 여왕에게, 용으로 형상화된 오스만 터키와 날개 달린 사자로 상징하는 베네치아가 머리를 숙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다툼 속에 나라를 지키려는 간절한 희원이 읽힌다.

군둘리치 동상과 부조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

길 끝에서 계단을 오르면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이다.

로마 건축가 Andrea Pozzo SI 설계로 1699 년에 시작되어 1725 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건물은 부분적으로 로마의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1735 년부터 1737 년에 성소의 프레스코 화를 그린 사람은 시칠리아의 거장 Gaetano Garcia이다.

교회 뒤쪽에는 루르드 성모의 동굴이 있는데, 유럽에서 처음으로 1885년, 교회 안에 지어진 것 중 하나라고 한다.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의 정면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의 천정화와 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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