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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Jun 04. 2021

◆35. 부다페스트2. 천천히 걸어서 보자, 부다성!

헝가리 역사를 담은 부다 성의 내력

석양의 숙소 거리

체크 인 중, 스텝이 '한국인 리뷰 보고 왔느냐'고 묻는게, 리뷰 자신 있다는 걸로 읽힌다. 여성 도미토리 4인실인데 모두 단층 침대인 점이 특히 맘에 들었다.

창가 자리를 선택, 짐만 두고, 거리로 나선다.

오후 8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환하다.

아까 공항에서 올 때 바쁘게 스쳐 온 거리를 되짚어 걷는다.

고가도로 너머 대각선 쪽에는 1877년 10월 28일에 개통했다Nyugati(서부) 기차역이 있다. 역사가 지어졌을 당시의 화려했을 면모가 충분히 상상되기에, 눈앞의 모습은 마치 절세가인의 노년기 모습을 보는 것 마냥, 짠해진다.

1877년 무렵 Nyugati 기차역.

Nyugati 지하철역 사거리 광장을 가득메운 퇴근길의  젊은이들 모습이 묵직한 이 거리에 경쾌함을 섞는다.

문득,

TV프로에서 외국의 어느 가이드가, 자신은

'늘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는 좋은 직업을 가졌다던 말이 떠오른다.

홀로 여행자인 나 역시,

거리 가득 맴돌며 부딪쳐오는

봄 밤의 바람 결속에 서니,

낯선 땅의 기운 받아들일 채비, 충만!


도미토리 룸메, 멕시코 여성

온 저녁거리를, 공용 dining kitchen에서 해결하고 방에 들어가니, 

 침대 룸메가 돌아와 있다.

육중한 몸매의 20대, 멕시코이다.

남미에 가본 적 없는지라, 내 질문이 늘어진다.

알려진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며

사근사근, 상냥 말투로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니

그녀가 내일 떠난다는 게 섭섭다.

거의 매일 바뀌룸메 신경 써지는 건 도미토리 숙소 단점.

다인실이라 상대의 거동 모두가 서로의 촉수 반경 내에 드니, 민감해 질밖에.

면, 

저렴하고, 말 상대를 만나 정보를 얻고, 때론 일정 동반자까지 될 수 은,

홀로 여행자에겐 큰 장점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도미토리와 개인실을 번갈아가며 이용할 예정이다.


자신이 사용하던 '72시간 사용 교통권'을 인계하겠느냐고 하길래, 수락하고 액수까지 정했다.

그런데 내일 오후 떠나기 전까지 사용한 후에 주겠단다.

이제 시작할 4일간의 내 일정 상, 조각난 교통권이 오히려 불 거래 같은데, 그냥 'Ok' 한다.

본인은 어차피 사용할 수 없는 교통권을

약 8천 원(2000ft)을 받고 넘기는 그녀의 금전관리, 한 수 배운다 생각하며.


100년 된 건물의 발코니에서

4인실을 둘이서 차지하니 고즈넉다.

사용하지 않아 삐걱는 문을 어렵게 열고, 발코니로 나가본다.

잔양이 사라든 거리는, 차량 행렬 분주하고,

어둠에 안긴 건너편 극장은, 조명발 아래 졸고 있다.

극장 지을 당시, 이 동네는 늪지였다고 한다.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마가렛 다리와, 불과 2~300m 떨어져 있는 이 터의 150여 년 전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마도

극장보다 더 이전에 건축되지는 않았을,

이 숙소 건물의 초기 주인들은,

(숙소 스탭 말로는 건물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장식 가득한 멋진 이 발코니에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섰으리라!

하나

세월에 삭아내린 창틀과,

손길 안 미쳐 쓰레기 쌓인 오늘의 발코니에는

멀리 서 온 이방인이 서서

호기심 가득 담고, 밤거리 스캔 중이다.

코미디 극장 건축당시와 현재의 주변 모습

첫날밤

늦은 시간까지,

그리고 꼭두새벽부터,

총 8차선 도로를 오가는 각종 차량 소음

지축을 울리는 진동으로 잠을 설쳤다.

이렇게 대단한 소음, 진동은 난생처음이다.

오래된 석재 도로 위 여행가방 밀고 갈 때 나는 소리와 진동을 확대해 보면 짐작 터.

남은 3박 채울 일이 걱정이다.

원래는 씩 나 주택가 에어비앤비 2박 예약했었으나,

젊은 직장여성인 호스트에게 열쇠 넘겨받는 절차가 편치 않아, 포기하면서 차질이 생겼다.


부다 언덕을 향해

숙소 앞에서 4번 트램을 타고 16번 버스로 환승하니

부다 성 후면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 도로에 정차한다.

길가 건물 안에 성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예전 여행 때 둘러보았던 이 미술관

서구 유명 미술관에 비해,

명장들의  알려 작품들, 

낯선 러시아 작가들 작품들을 다수 만날 수 있음이 

매우 신선했었다.

오늘도 하루 온종일 관람하고 싶은 맘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걸어서 시내 구석구석을 보잔 계획 살리기로 하고

전에 보지 못한 역사박물관과 성 주변, 주택가 골목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부다 왕궁 변천사

헝가리 역사의 다난함과 더불어

왕궁 또한 질곡의 세월을 거친 후에야, 오늘의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1000 이슈트반 1(István I, 975~1038, 재위 997-1038)

로마 교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공국은 헝가리 왕국이 된다.

1102년에는 칼만 왕이 크로아티아의 왕위에도 오르며

크로아티아-헝가리 연합(1102~1526)을 결성,

발칸 반도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십자군 전쟁 중에는 유럽 최강국들 중 하나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1241년 벨러 4세 때 

몽골군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의 약 60%가 사망하면서 국력이 일시적으로 쇠퇴지자,

왕궁지 에스테르곰을 대주교에게 양도하고,

도나우 강변 언덕,  

성과 방어용 요새를 건설하였다.

이후 14세기에는 고딕 양식의 왕궁으로 증개축되었고,

15세기 후반, 마차슈 1세 때에는 헝가리 르네상스의 막을 올리면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되었으나,

왕 사후, 왕국은 오스만의 압력을 받으며 쇠락해간다.

16세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왕궁은 괴멸되고 나라는 3분 된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움으로 150간 지속된 오스만령을 돌려받, 전성기 시절 영토로 회복하였으나,

다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왕궁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신축, 18세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으로 203개의 방을 갖춘 모습이 된다.

19세기 후반, 대화재가 발생하여 왕궁이 대부분 소실되 다시 대개축을 시작, 1904년에 완공하였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다시 큰 타격을 입었고,

2차 대전 후인 1949년에 헝가리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면서, 왕궁 및 많은 유적들이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여겨져 파손되었다.

1956년에 공산주의에 항거, 대규모 시위로 소련군의 탱크부대 위력 앞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났음에도

구 소련의 붕괴와 함께 헝가리는 1989년에서야  민주국가로 태어났고, 현재의 건물은 1980년대에 재건된 것이다.

현재 왕궁은 국립미술관과 박물관, 

궁의 일부는 2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세체니 도서관으로 꾸며, 중세의 사본 등을 전시하고 있.


파괴된 당시의 사진 속 왕궁, '초토화' 표현의 가장 적합한 예시자료로 보인다.

철저히 파괴되어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한 손길에,

 감탄다.


도나우 강에 면한 왕궁의 정면(미술관)
분홍색 건물은 왕궁 안의성당
부다 성 앞 마당
왕궁의 정면
정면
성에서 내려다본 도나우 강과 세체니 다리
성과 Déli Rondella 의 통로
 강가의 Castle Garden Bazaar
성 남쪽, 역사박물관으로 이동하는 길
성에서 남쪽의 Déli Rondella로 가는 통로
Mace Tower
역사박물관 오르는 계단
세체니 도서관 건물 앞의 사자상

부다 성 앞, 외젠 공작 기마상

사보이 귀족 출신이며 오스트리아 장군인 외젠 공작
외젠 기마상

외젠 장군

유럽 역사 탁월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사보이 귀족으로, 파리에서 태어나

루이 14세 궁정에서 성장했으나,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충성했다.

그가 명성을 얻은 결정적 계기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오스만 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면서이다.

특히 이 헝가리 전투에서 저지된 오스만의 위세는

당시 방대한 유럽 지역으로의 진출세가 꺾임으로써

점차 물러나 되었다. 

결국 기독교 국가를 덮쳐오던 이슬람권 오스만의 승기를 외젠장군이 막아냈다는 공로가 부여된것이다.

외젠 동상은 빈의 벨베데레 궁을 비롯, 여러 도시에서 만날수 있다.


헝가리로서, 외젠 덕에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에 패배 잃은 영토를

150년 만에 왕국 최전성기 상태로 회복할 수는 있었.

그러나 곧 바로 오스만 대신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에 바로 할양되어,

1867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의 자치 왕국으로 승격될 때까지 지배를 게되었다.


그러니  헝가리 독립국가 선포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기마상이

부다 성 에 위치하는 이유는,

유럽을 향해 진격해오던 16세기 오스만의 기세를 꺽은 공로가 워낙에 다대하기 때문 ?


헝가리 중흥기와 르네상스를 이끈  마차시 1세 왕께서는

부다 왕궁 뒤뜰, 사냥터 분수계시는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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