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있는 것 - 제품 제조 기술
가지지 못한 것 - 인지도, 마케팅 역량
가진 것과 필요한 것까지는 구분했으니 이제 필요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정할 차례였다.
사람을 충원해 달라고 해야 할까? 나도 잘 모르는데 충원하면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지? 무작정 맡기는 게 맞을까? 그리고 방향성을 말로 설명한다고 공감이 될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생각이 가득했지만, 더 고민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는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서툴더라도 '다른 것을 모방하지 않는 것'.
디자인을 할 때 레퍼런스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레퍼런스 없이 작업을 시작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니 이 경우도 대상이 사라지거나 방향이 바뀌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롱블랙 컨퍼런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 제가 생각하는 좋은 브랜드 스토리입니다.' 한 사람'이란 창업자를 말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브랜드가 직면한 과제들에 분투하는 과정을 말하죠. '긴 여정'이란 브랜드가 쌓아 올린 시간을 말합니다."
- 김명수. 매거진 『B』대표
좋은 브랜드 스토리의 정의 │ 김명수. 매거진 『B』대표
3월에 다녀온 컨퍼런스였지만, 꼭 맞는 정의었기에 이 문장으로 시작된 강연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브랜드는 멋있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 해요. 김 대표는 이를 브랜드의 정면이라고 부릅니다. 이 정면만을 노출해서는 결코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 수 없어요. "브랜드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예요. 측면, 이면, 그리고 내면이 존재하죠. 이런 이면을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 것이, 브랜드텔링이에요."
- 김명수. (2024년 3월 20일). 스토리 2024: 매거진 B와 메타코미디가 말하는 브랜드텔링. 롱블랙. -
브랜드 텔링의 정의 │ 김명수. 매거진 『B』대표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 이거라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게 이목을 끌거나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야기를 써나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꾸준히 해나갈 수 있는지였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 나의 성향과 너무 다르면, 지속성에서 문제가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명확한 콘셉트도 없고, 제작 제품도 없고, 오로지 하겠다는 생각만 있지만 일단 그 모든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쓰다 보면 언젠가는 공감하거나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마음이었다.
글을 어디에 올릴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브런치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내가 쓰려는 글의 성격이 이곳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도 정해졌고, 플랫폼도 정해졌지만 문제는 회사의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배경, 방향성, 글의 콘셉트를 정리해 보고를 드렸다.
나 : 저 이런 이유로 이렇게 글을 써보고 싶어요.
상무님 : 그래, 그렇게 해보자.
나 : 근데... 이 글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율성 보장'이에요.
상무님 : 그래, 중요한 부분이지. 그것도 그렇게 해. 다만, 회사 방침상 아이디는 회사 아이디로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글은 당장 쓴다고 어떤 반응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꾸준히 쓰다가 몇 개월 지나고 나면 그때 보는 걸로 하자.
나 : 네, 그렇게 할게요!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바로 승인이 났다. 하지만 이후의 대화에서 상무님이 걱정하시는 부분이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상무님의 걱정은 '회사이야기를 외부에 공개한다'가 아니라 '내가 글을 쓴다.'는 점이었다.
자율성 보장보다 걱정되는 나의 글쓰기
상무님과는 입사 초부터 꾸준히 함께 일해왔지만, 그동안 나눈 대화들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상무님이 보시는 나는 이런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도 지금까지 보여드린 내 모습을 생각해 보면, 걱정하시는 부분이 뭔지 너무 알 것 같아 다른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나중에 글을 주변에 보여주고 괜찮다는 얘기를 듣게 되면, 그때 보여드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재밌지도 트렌디하지도 않은 브랜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쓴다는 게 아직도 너무 낯설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상무님의 우려가 현실화된 것 같지만, 글 쓰는 게 적응되고 조금씩 편해지면 언젠가는 나다운 글과 따뜻함 묻어나는 글이 나올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글을 쓰고 있다.
보고드릴 때는 일주일에 3회를 쓰겠다고 호기롭게 얘기했지만, 사실 그건 글을 한 편도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첫 글을 쓰고 나서야 그 목표가 얼마나 무리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3회 연재하겠다는 다짐은 전혀 지켜지지 못했다. (죄송해요 상무님)
그리고 지금까지 이 글을 포함해 총 5개의 글을 올렸지만, 아직 회사의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했다. 대신, 카톡 대화에 그린 캐릭터만 보여드리며 이렇게 그려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했다.
아마도 최소한 10개 이상의 글을 쓰고 나면, 그때서야 공유할 용기가 생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