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남편은 9월부터 실업자가 되었고, 아직 임금체불 중이었다.
그동안 그는 쉼 없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나이도 많고, 위암으로 한동안 경력이 단절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병은 완전히 회복되었지만, 삶은 여전히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오래전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건강상의 문제로 집에서 쉬고 있었다.
눈앞이 막막했다. 그동안 비상금으로 모아둔 돈을 조금씩 쓰며 버텼다.
그래도 내일은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다행히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남편은 요리사였다. 조선호텔과 조선컨트리클럽에서 7년 정도 일했고,
기독교방송국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식당에서 일한다.
그는 경력도, 명함도, 스펙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일했다.
울산으로 내려간다는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전화를 했는데,
그 사장은 30분 동안 자기 신세 한탄만 했다. 그동안 요리사들이 일을 못해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난감했지만, 남편은 두달 넘게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조급한 마음이었고
결국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사장은 음식 테스트를 하겠다고 했다.
남편에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왠지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나는 바람도 쐴 겸 동행하기로 했다.
운전은 번갈아 하기로 했다. 속초를 지나 양양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긴 터널이 이어졌다. 조용한 적막을 깨고 남편이 말했다.
“터널 끝은 있어… 힘들어도 우리 견디자. 좋은 날 오겠지.”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났다. 창밖의 가을 풍경을 보며
‘그래, 이것도 지나가겠지…’
나도 남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웃었다.
그러다 문득,
부와 가난, 빛과 어둠, 선과 악…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소설의 이야기가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나는 차 안에서 메모를 시작했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인물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는데 남편의 전화기가 울렸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거래처 사장님이었다.
그분이 한 곳에 연락을 했는데 마침 그곳에서 요리사를 구하고 있었다.
남편은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통화를 했다.
그리곤 울산에 연락을 하고,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남편은 그곳으로 찾아갔고, 결국 취업이 결정되었다.
나는 차 안에서 쏟아진 그 소설의 이야기를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틀 만에 써 내려갔다.
그렇게 1편, 16화를 썼다.
그러고 나서 몸살이 왔다. 열이 오르고 오한이 났다.
아이들 밥을 차리려 주방으로 나가보니 쌀은 한 줌 남아 있고,
냉장고에는 달걀 네 개뿐이었다. 투명한 반찬통이 텅 비어 반짝 였다.
그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이자고 말했다. 아이들은 오히려 신이 났다.
아이들과 라면을 저녁으로 먹고 몸살약을 먹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점점 통장은 바닥을 보였다.
적금을 깨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침이 되자 오한과 두통이 심해졌지만
아이들 아침을 차려야 했다. 쌀통에 남은 한 줌의 쌀과
전에 사둔 보리쌀 두 줌을 씻어 밥을 했다.
야채칸에 남은 무와 냉동실에 있던 소고기 조금으로 뭇국을 끓였다.
얼마 전 교회에서 산 옥수수를 버터에 구워 식탁 위에 올렸다.
‘내일은 적금을 깨야 하나…’ 생각이 자꾸 그쪽으로 흘렀다.
점심엔 뭇국에 밥을 말아먹고 약을 삼켰다.
저녁이 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들이 곤히 자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기도라기보다 독백에 가까운 말이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다움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창문틈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
빈 쌀통 위로, 빛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그 순간 문득 생각 했다.
터널 끝이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견디는 동안
조용히 찾아오는 작은 희망의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