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옹지마(塞翁之馬)
그렇게 나는 행복한 아내로, 엄마로 살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가족의 사랑과 축복 속에서 두 자녀를 출산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들….
나의 아픈 손가락인 큰아들도 동생들을 참 많이 아꼈다.
늘 동생들을 누구보다 사랑해 주는 형이었다.
동생들이 생겨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던 큰아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감사했다.
막내를 출산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해외로 일을 하러 가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남편이 먼저 해외로 들어갔고, 이후 아이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해외 이주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친정엄마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된 막내 딸을 안고 함께 동행해 주셨다.
우리는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아파트에 입주했고,
엄마는 보름 정도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낯선 환경, 사람을 사귀는 일은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일 년이 넘도록 나는 그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일에 나가는 한인 교회가 전부였다.
남편은 늘 바빴다.
그럼에도 점심시간이나 잠깐의 쉬는 시간마다 집으로 달려와
아이들을 보고, 나와 아파트 아래 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신 뒤
다시 회사로 돌아갈 만큼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과 퇴근한 남편,
우리 가족은 아파트 단지 안의 예쁜 정원을 산책했고
주말이면 온종일 함께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도
나는 늘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을 안고 살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속에 늘 하나님 아버지께 뭔다 단단히 화가 나있는듯 했다.
“왜요, 하나님?
왜 꼭 저는 그런 아버지를 만나야 했고
늘 외로움과 허전함 속에서 살아야 했나요?”
그 의문은 나를 우울 속으로 끌어당겼고,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저녁이 되면 베개를 적시며 울곤 했다.
동생은 중국에서 사역하며 한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자주
내가 있는 베트남으로 놀러 왔다.
선교사로 적은 사례비를 받으면서도
늘 조카들의 옷이며 간식, 학용품을 한가득 챙겨 왔다.
늘 기도하며 나를 응원해 주는 동생이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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