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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May 17. 2024

색채와 구도가 바뀐 풍경

2023. 10. 02.

이 글은 시력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여름이 깊어져갈수록 짙어지는 나뭇잎보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섞여 불 때 막 돋아난 여린 잎을 좋아한다. 그다음 좋아하는 것은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아닌 짙은 초록에서 조금씩 색이 빠져 채도가 낮아진 탁한 잎이다. 그 색 빠진 잎이 가을바람에 흔들릴 때 구름 한 점 없는 공활한 가을하늘과 어우러짐이 내가 여태까지 본 최고의 조화다.


키는 성인이 되면서부터 거의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167cm가 바라보는 세상은 십수 년째 계속되고 있다. 앉거나 서는 건 별다른 차이를 주지 못한다. 높은 건물을 오르내리면서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는 조작변인은 아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로 인해 실제로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여태까지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일 수 있지만, 이 또한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써 발생한 현상일 수 있다. 그 순간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천천히 쌓이면서 역치를 넘는 순간 찾아온다. 그때는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이해되고, 때로는 이해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그간 다양한 상황을 점치며 재고 따졌던 것들은 모두 의미 있다. 의식적으로 사고했던 것들은 무의식에서도 끊임없이 작용한다. 과정과 결과를 일일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인 판단은 우위가 있다. 회오리치는 생각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가도 어느 지점에서 내 마음이 편함을 느끼게 되고, 그곳이 내가 한동안 머물러도 된다고 판단하는 곳이 된다. 논리적인 설명은 이때 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시간에 의에 풍화된 풍경이라는 가설은 설득력이 낮다. 가을을 맞아 잎이 탁해지지도, 내 키가 자라지도 않았다. 시력은 객관적일 수 있으나 시각은 주관적이므로, 그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에만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 그 무게를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

- 다른 사람의 장점 찾기
- 생각 전환하기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중


지금의 내가 무엇을 보고 싶고, 무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는 무의식만이ㅡ의식적으로는 오래 생각하면 아주 피상적으로는ㅡ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무의식은 그간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슬기로운 판단을 도울 것이다. 나는 그간의 삶의 경험과 나름대로 정립한 가치관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면서 삶의 색채와 구도도 더욱 다채로워지겠지. 나는 나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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