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거 아니지?
늙었나 보다. 점점 과거로 가고 있다. 현재는 아침마다 노인정에 출석하는 노인처럼 삶이 고즈넉하고 재미없다. 미래는 캄캄하다. 출산율이 반토막이 났다는데, 생각해 보면 필자도 출산은커녕 연애도 못하고 있다. 돈과 기력이 없다. 분신이 세상에 하나 더 생기는 게 무섭기도 하다. 그간 날아다니는 민들레 홀씨처럼 정착 못하고 떠돌았다. 대물림하고 싶진 않다. 강아지만 키워 봐도 생각보다 대소변도 자주 치워야 하고, 산책도 매일 시켜야 한다. 돈은 예상했던 것의 최소 열 배는 든다. 의료보험이 없어서 그렇다. 사설이 있긴 한데 여덟 살인가 몇 살 이상은 안 받아준다.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다니는 강아지도 그러는데, 하물며 위가 작아 밥도 수시로 공급해야 하는 생명체를 낳아 사람 만드는 과정은 어떻겠는가? 기저귀값 몇 푼 준대도 절대 다이소에서 장바구니에 천 원짜리 물건 넣듯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또, 나중에 살짝 다룰 생각인데, 인터넷이며 유튜브에는 남녀갈등이 가장 큰 화두다. 남자는 국제결혼을 말하고, 여자는 혼자 출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열심히 한다'의 어떠한 기준도 없다. 누군가는 교과서를 외우는 것을, 또 다른 누군가는 필사하는 것을 노력이라 할 것이다. 정작 서울대 가는 사람은 외우지도, 필사하지도 않은 수능 만점자겠지. "저는 열심히 하는데요? 성과는 이 모양이에요."를 강조하거나 남발한다면 사기꾼일 확률이 절반 이상이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면 우린 그걸 '살인자'라 부른다. 불의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져 모든 장기를 기부하고 영면하게 되면, 의도가 없었어도 '위인'이라 부른다.
유치원생 시절, 색종이를 오려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만들어 본 적이 있는가. 리본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감사하다는 말을 써넣었겠지. 아무리 허접해도 부모님은 그걸 하루 종일 가슴팍에 달고 다녔겠지. 웃어 주었겠지. 다만 서른이 넘은 필자가 그걸 재현한다면? 귀싸대기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한테 이 대접받자고 키웠냐"며. 가끔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하교하는 초등학생들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백팩이 몸에 비해 커서 어깨 위로 바싹 올라올 정도다. '아장아장' 걷는 태가 조금 남아 있다. 종이 카네이션이 나중엔 생화로, 지폐 섞인 꽃바구니로 바뀔 가능성이 있으니 보고 웃어주는 거겠지, 그렇겠지. 영원히 그걸 내밀 수 있을 대상은 어디에도 없겠지.
가끔 필자가 핑킹가위를 들고 분홍색, 빨간색 색종이를 자르는 상상을 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부여잡는다. 필자가 이렇게 말은 해도 가끔 그립기도 하다. 미완성인 그림을 과학 상상화 대회에 제출해도, 체육 시간에 참여 안 하고 그늘에 앉아 놀고 있어도, 받아쓰기에 빈칸 없이 채워 넣었지만 빵점을 받아도 웃어주고 뒤탈 없이 넘어가주던 그 시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