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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천국, 제기동

by 플레이런너


얼마 전 제기역 근처로 이사를 왔다. 이사 기념으로 평일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친 뒤 동네 치킨집에 들렀다. 주문을 마친 후 가게 내부를 둘러보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내가 익숙한 마장동, 왕십리, 성수동의 치킨집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손님 대부분이 어르신들이었던 것이다.

대체로 한 테이블에 할아버지 한 분과 할머니 두세 분이 앉아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들의 옷차림이 눈길을 끌었다. 흰 셔츠, 흰 바지, 흰 구두에 흰 중절모, 그리고 빨간 나비넥타이 또는 청색 나비넥타이까지, 일상복이라기보다는 마치 특별한 외출복 같았다. 할머니들 역시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릴 적 어머니가 ‘반짝이’라고 부르던 보세 옷들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젊은 시절 미팅에 나온 사람들처럼 들뜨고 설레 보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치킨집만 그런 걸까? 곧장 옆 가게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손님의 대부분은 어르신들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근처 빵집과 카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뭔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경동시장 때문일까? 장 보러 오셨나?”

“아니면 주변에 많은 한의원과 한약방 덕분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동네에는 어르신들이 유독 많다는 사실이다.

며칠 후, 주말에 장모님과 처제와 함께 다시 그 치킨집을 찾았다. 평일과 마찬가지로 어르신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이쯤 되니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이 동네만의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킨집 밖에도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골목 곳곳에서는 서성이며 대화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마침 치킨집 쪽으로 걸어오는 어르신 무리를 보고, 그들의 동선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걸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콜라텍'이었다. 콜라텍은 콜라라는 음료와 디스코텍의 합성어로 1980~1990년대에 고령화 사회에서 등장한 새로운 문화 공간이다. 제기동처럼 전통 시장이 있는 지역에 밀집해 있으며, 어르신들의 놀이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 발견으로 동네의 활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입구 돌난간에는 더 많은 어르신들이 앉아 있었고,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정하게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눈에 띄던 화려한 복장의 정체도 풀렸다.

콜라텍 바로 옆에는 어르신 대상 의류 매장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경동시장 구경도 할 겸 청량리 시장까지 걸어갔다. 그곳 역시 어르신들로 북적였다. 알고 보니 이 일대에도 콜라텍이 여러 곳 있고, 그 주변에는 어김없이 양품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제기역에서 청량리시장까지 이 일대는 어르신들의 놀이터이자, 그들만의 유토피아였다.

벤치에 무심히 앉아 있는 익숙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곳 어르신들의 얼굴에서는 생기와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활력은 지역 경제에도 활기를 더하는 듯했다.

이 놀이터, 즉 콜라텍의 공통점은 ‘건강’이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규칙적인 신체 활동은 뇌의 혈류를 증가시키며 새로운 뇌세포 생성에도 기여하여 인지 기능과 기억력을 개선한다. 또한, 운동은 불안과 우울을 완화하고 전반적인 웰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콜라텍에서 춤을 추는 어르신들의 밝은 표정은 우연이 아니다. 건강한 신체, 활발한 정신, 그리고 소통의 장이 주는 행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차는 춤, 2차는 뒤풀이, 자연스레 형성된 노년의 문화, 이곳 어르신들은 몸도 건강하지만, 여유 있게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삶의 재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밝은 표정은, 무엇보다 정신 건강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한 때는 춤 문화가 낯설고 퇴폐적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이제 콜라텍은 건전한 노년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1990년대 무도장 시절의 어두운 이미지가 강했던 이 공간은, 2000년대 들어 사회적 분위기가 '건전한 생활체육'을 강조하면서 변화의 물결을 탔다. 지역 복지센터의 춤 강좌 지원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TV 다큐멘터리나 신문 기사에서 '어르신들의 활력 공간'으로 재조명되면서 퇴폐적 낙인이 점차 사라졌다. 입장료가 1,000~2,000원 정도로 저렴한 덕에, 누구나 부담 없이 매일 방문할 수 있는 '작은 사치'가 된 셈이다. 제기동 일대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이런 따뜻한 에너지로 가득 찬 무대처럼 느껴졌다.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광내고 출근하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행복’ 일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며, 몇 년 전부터 사교춤을 배우기 시작한 지인들이 떠올랐다.

이 동네 이사 온 뒤, 그 지인들의 선택이 새삼 부럽게 느껴졌다.

나는 척추협착증 때문에 하루에 한 번쯤은 잠시 양쪽 발바닥이 저리다.

콜라텍에서 파트너와 춤을 추다가 “잠시만요” 하고 의자에 앉아 발을 주무르는 나를 상상해 보니 웃음이 났다.

나도 이 동네 어르신들처럼 건강하게 움직이자.

콜라텍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어르신들을 보며, 나도 하루하루를 ‘신나는 출근’처럼 살아보고 싶어졌다.

이 천국 같은 동네에서, 나 역시 삶의 무대를 밝게 비추며 살아가고 싶다.


콜라텍 바로 옆에 있는 양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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