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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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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Jun 13. 2024

킹콩

인종 차별 영화

1933년에 개봉한 킹콩 첫 번째 작품. 단순한 괴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를 담고 있다. 제작한 곳이 미국이니까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라 하면 당연히 백인과 흑인의 반목이 연상된다. 맞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백인이 흑인을 혐오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찌하여 고릴라가 난동 부리는 영화에 그런 구도와 장치가 숨어 있는 것일까.

우선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는 미국 뉴욕을 살펴보자. 첫 신에 항구와 선실이 나온다. 그곳에 있는 인물은 모두 백인이다. 배에서 일하는 선원도 백인이다(황인-중국인 한 명 있음). 칼 데남이 여배우를 구하러 도시를 탐색할 때도 백인밖에 없다. 영화 후반부에 킹콩이 도시에서 난동을 부릴 때 극장에 있는 관객도 백인, 극장에 몰린 기자들도 백인, 호텔에 투숙한 손님도 백인, 열차에 탑승한 승객도 백인. 그 도시는 백인 천지다. 미국 뉴욕인데 흑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흑인을 스크린 밖으로 몰아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럼 정말 흑인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가. 아니다. 흑인은 미국이 아니라 킹콩이 사는 섬에서만 등장한다. 흑인은 오직 그곳에만 있다. 백인은 미국 도시에 살고 흑인은 동떨어진 섬에 산다는 이 설정은, 백인은 흑인과 질적으로 다르며 백인과 흑인은 섞일 수 없고 미국 땅에서 흑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백인우월주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또한 킹콩이 사는 섬에 흑인만 살고 그들이 킹콩을 경외의 대상으로 추앙한다는 것은 킹콩이 곧 흑인이나 다름없다, 킹콩이 흑인을 상징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섬에 살다 미국 뉴욕으로 피랍한 킹콩의 처지는 아프리카에 살다 아메리카로 팔려 온 흑인 노예의 처지와 흡사하다. 감독은 이렇게 킹콩을 흑인의 상징물로 만들기 위해, 즉 인종적 차별 구도를 영화에 집어넣기 위해 백인과 흑인의 장소를 양분한 것이다.

당연히 영화에서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 이는 여러 장치를 통해 드러난다. 흑인은 활로 킹콩을 공격하지만 킹콩은 죽지 않는다. 백인은 총으로 섬에 사는 공룡을 무찌르고, 흑인 원주민에게 겁을 주고("원주민은?" "두려워하고 있어." "왜?" "총을 수십 발 쏘았더니 도망쳤어."), 영화 마지막 복엽비행기에 달린 총으로 킹콩을 사살한다. 총이 활보다 (당연히) 우월한 것이다.

또 백인은 섬에서 원주민들이 건설한 킹콩 방지용 대문을 쉽게 드나들고 점령하지만, 그 킹콩 방지용 대문은 흑인 원주민의 본인 문명에 대한 우월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볼 수 있는데, 킹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지만 곧 총에 맞아 바닥으로 추락한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백인 문명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인데 흑인을 상징하는 킹콩이 그 정상에 올라 권좌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백인한테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킹콩은 익룡은 이겨도 복엽비행기는 이기지 못한다.

흑인 추장은 앤을 보고 자기네 여자 여섯과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선장과 칼 데남은 이 제안을 당연히 거절한다. 흑인 여자 여섯보다 백인 여자 하나가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칼 데남은 영화의 성공을 위해 미인을 찾고 있었고 그 적임자가 앤이었는데, 만약 흑인 여자가 백인 여자보다 예쁘다면 그는 추장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킹콩은 이러한 백인우월주의에 대항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백인 여자 앤을 짝사랑하며 그녀를 갖기 위해 도시에서 난동까지 부린다. 여자를 정복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킹콩이 앤을 짝사랑한다는 것은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를 넘본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백인 세계를 흑인이 점령하겠다는 의욕까지 담고 있다. 그래서 백인 문명을 상징하는, 혹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킹콩이 올라간 것이다. 물론 백인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흑인을 응징해 버린다. 영화 마지막에 경찰이 킹콩의 사체를 두고 칼 데남에게 묻는다. "비행기가 죽인 겁니까?" 칼 데남은 미녀가 야수를 죽인 것이라고 답한다. 이 말은, 해석해 보면 흑인 남자가 주제넘게 백인 여자 좋아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백인 여자 넘보지 말라는, 백인 여자 좋아하는 흑인 남자에 대한 백인 남자의 경고와 협박인 셈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흑인이 상류층에 입성하는 것(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철저하게 막겠다는 백인들의 의지인 셈이다.

이런 강경한 백인우월주의를 입증하듯, 킹콩은 앤을 사랑하지만 앤은 킹콩을 혐오한다. 앤을 차지하는 쪽은 킹콩이 아니라 백인 남자 드리스콜이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인식은 그렇다. 앞서 선원 중에 황인이 있다고 언급했는데 그를 통해 황인에 대한 백인의 인식도 알 수 있다. 그 동양인 요리사는 6주간 감자만 깎았다고 말한다. 납치된 앤을 구하러 선원들이 떠날 때 그가 자기도 가고 싶다며 청하지만 백인 선원은 "요리 할 일은 없으니까 식당으로 들어가."라고 물리친다. 이는 황인이 백인 사회에서 주요 업무를 맡는 것이 아니라 백인의 보조자 혹은 도우미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황인은 총(주요 업무)을 들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앤이 선상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을 때 그 동양인 요리사가 자기도 찍고 싶다고 말하자 백인 선원이 "기계가 고장 나니까 그만둬."라고 놀린다. 이것도 황인에 대한 백인의 멸시와 조롱이 담긴 인식이다. 그때 장면에서 세 명이 기둥에 매달려 있는데 동양인 요리사가 가장 아래에 있다. 황인은 백인 세계에서 가장 하층인 셈이다. 또, 바다에 안개가 끼어 난항일 때 백인 선원이 동양인 요리사에게 "안개에 효과가 있는 주문은 없을까?"라고 농담조로 말한다. 동양의 미신적 비과학적 풍습을 비꼰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백인이 다른 인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주인은 백인이고, 하인은 황인이고, 죄인은 흑인이다.

위 장면은 앤과 드리스콜이 처음 만난 때이다. 드리스콜은 약간의 여성혐오자다. 그는 여자를 짐처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래서 함께 승선한 앤에게 까칠하게 군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막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 심지어 옷 색깔마저 흑백으로 대비된다. 그러나 후에 둘이 사랑에 빠졌을 때(아래 장면) 그들 사이에 장애물은 없다. 옷도 환한 색으로 비슷하고, 원숏으로 잡을 때도 위와 다르게 장애물이 아니라 서로를 걸치게 잡아 놓는다. 이는 두 사람이 가까워졌음을, 서로 사랑에 빠졌음을 표현한다.

배에서 바라본 원주민의 섬이다. 영화는 백인과 흑인을 명확히 구분하는데, 백인이 탄 배 이쪽과 흑인이 사는 섬 저쪽을 기둥과 밧줄 같은 장매물이 구분해 놓은 모습이 보인다. 시야를 방해하는 이런 장치는 대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는데, 저 섬이 그리 환영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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