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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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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Jun 14. 2024

인 더 파크

초기 채플린은 무법자

채플린의 초기 단편. 당연히 무성영화고 흑백 필름을 누런빛으로 염색한 단색영화다. 솔직히 재미없다. 채플린이 워낙 유명하니까 명성만 믿고 그냥 보는 것이다. 영화사적으로 눈여겨볼 점도 없다. 당시 흔했던 오락 영화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영화는 연극에서 진화했으므로 초기 무성영화는 연극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엄밀히 말하자면, 초기 영화는 아직 연극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의 예가 2차원 평면성이다.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구분돼 있고 극은 오직 무대에서만 이루어진다. 무대는 철저하게 객석을 대상으로 짜인 곳이다. 영화로 따지면 객석이 카메라고 무대가 촬영장이다. 카메라(객석)를 떠난 촬영장(무대)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 카메라(객석)는 한곳에 고정돼 있기 때문에 촬영장(무대)의 사건과 행동은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인물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도 객석의 관객은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기에, 정면만 본다는 것은 대상을 2차원으로 파악한다는 뜻이기에 그들은(무대의 인물) 연극의 평면성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 무대에서 상하좌우 뛰어다녀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각적 각도가 변하지 않으므로 무대는 영원히 2차원이다. 쉽게 설명해서, 대상이 3차원이어도 그것을 보는 관찰자의 시각이 2차원이라면 대상도 하릴없이 2차원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연극의 무대 공간에서만 따지면 인물들이 상하좌우 입체적으로 움직이므로 3차원이 맞지만 객석에 앉은 관객의 시각에서 따지면 관객의 시각은 정면으로 고정돼 있으므로 관찰의 대상인 무대는 역시 2차원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3차원'이 되려면 관찰자가 시점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대상을 여러 방면에서 관찰할 수 있어야 그게 3차원이다. 현대 영화는 카메라를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므로 당연히 3차원(엄밀히 말하면 3차원 시점)이다. 그러나 지금 소개하는 이 영화, 즉 초기 영화는 컷은 있어도 카메라가 연극 객석의 관객 시점처럼 고정돼 있으므로(정면만 바라보므로) 2차원적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초기 영화가 벗지 못한 연극적 티, 바로 2차원 평면성이다.

이러한 시각적 - 공간적 한계 탓에, MTV 편집에 익숙한 현대인은 이 영화(초기 영화)를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다. 정면 시점만 반복되므로 시각적 볼거리가 전무하다. 가끔 클로즈업이 등장하지만 의미심장한 목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기에 별 감흥도 없다. 차라리 클로즈업을 사건 전개에 필수적인 물건 혹은 재미를 위한 행동을 부각하기 위해 쓰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했다면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도 없었을 텐데 롱숏과 풀숏의 점철로도 모자라서 그 중요한 클로즈업을 허투루 쓰니 지루한 것은 당연하고 처음 봤을 때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 애 좀 먹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은 도둑(소매치기)이 귀족 여성의 손지갑을 훔쳐간다는 것이다. 손지갑 도난 때문에 여러 인물이 얽히고 공원이 소란스러워진다. 이것이 줄거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시정차에게 어떻게 보여줬는가?

무책임하게 이런 롱숏으로, 도둑이 손지갑 훔쳐 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화각이 넓고 대상이 많이 담긴 숏은 핵심을 부각하기 힘들다. 거의 불가능하다. 관객의 시선은 벤치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연인에게도 가 있고 뒤에서 틈을 노리는 도둑에게도 가 있다. 정말 예리한 관객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저 손지갑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화면에 처리할 정보가 많으므로 관객의 의식은 저렇게 작게 놓인 물건은 무화시킨다. 그것이 의식의 속성이다. 더군다나 도둑이 손을 뻗어 손지갑에 손을 대는 모습조차 나오지 않으니(그 전에 컷으로 잘리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관객은 오리무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 채플린이 소시지 장수와 나란히 앉아 있을 때 코를 막고 도망하는 장면이다. 채플린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무슨 냄새 때문에, 무엇 때문에 킁킁하다 기겁하고 사라진 것일까? 단순히 소시지 냄새 때문에? 하지만 그는 전에 소시지를 훔쳐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의문이 생기는 까닭도 숏의 크기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장면을 어중간한 풀숏으로 보여준다. 구도도 이상해서 인물이 살짝 옆으로 치우쳐 있고 배경도 화면을 많이 잡아 먹는다. 그런 상태에서 관객이 핵심 정보를 파악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영화를 한 번 보고 소시지 장수의 땀 닦은 수건을 감지한 사람이 있을까? 채플린이 코를 막고 도망한 이유는 바로 소시지 장수가 땀 닦은 수건으로 소시지를 닦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 장면을 미디엄숏도 아닌 어설픈 풀숏으로 보여줬으니 관객이 한 번 더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채플린 캐릭터에 대해 얘기하고 끝내겠다. 흔히 채플린을 희극의 제왕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봤을 때 이 표현은 틀린 듯싶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면 채플린은 희극이 맞지만 자세히 보면, 몇 번 곱씹어 보면 오히려 비극에 가깝다. 아니, 그의 영화는 완전히 비극이다. 그가 창조한 세계는 (초기 무성영화만 따지자면) 무법과 부도덕의 극치다. 남자들은 주먹부터 날리고 여자들은 재물만 밝힌다. 하나도 정상인 사람이 없다. 사기 치는 것은 기본이고 모든 일은 무력으로 해결된다. 완전 약육강식인 곳이 채플린 영화 속이다. 그가 관객을 웃기는 방법이, 현실에서는 행할 수 없는 엉뚱하고 과감한 폭력과 그로 인한 아수라장인데 그의 행동에는 명분이 없어 그가 악마처럼 보일 때가 많다. 채플린은 이 영화에서 무려 6가지 범죄를 저지른다. 절도, 폭행, 성희롱, 무전취식, 특수폭행, 자살방조. 범행을 웃기다고 하면 그건 정상인이 아니다. 영화라 해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그 도리마저 간단하게 무시해버리니 채플린 영화를 볼 때마다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명분 없는 화풀이 폭력이 아쉽다는 뜻이다. 나도 벽돌 던지며 싸우는 장면을 볼 때는 깔깔 웃었다.


카메라가 시점의 다변화를 획득함으로써 영화는 연극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초기 영화의 연극적 특성(평면성) 때문에 인물이 프레임 인과 프레임 아웃으로 등장하고 퇴장한다.

에드나 펄비안스가 본 책은 <WHY THEY MARRIED>이다. 그녀가 극중에서 결혼을 바라는 처녀라는 것이 책명을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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