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기를 능가하는 안 보여주기
<추락의 해부>한테 밀려 안타깝게 황금종려상을 놓친 영화. 2등 격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영화관에서 처음 보고 나왔을 때 <추락의 해부>한테 밀릴 만했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곱씹어 보니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사람들 불러 모아 빠따 쳐야 함을 느꼈다. 두 작품 중 하나만 영화사에 남겨야 한다면 나는 주저 말고 이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선택하겠다. 이 영화가 가치 있는 건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다르게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연출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이 영화의 그 부분을 높게 산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의 고통과 죽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기에 여타의 홀로코스트 영화보다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깔 게 없는 영화다. 연출, 각본, 연기, 음향, 촬영. 모든 게 완벽하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신에서 루돌프 회스가 계단을 내려오다 복도 저쪽(관객 입장에서는 이쪽)의 어둠을 응시하고 화면이 전환되어 현재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직원들이 청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그게 이 영화의 유일한 흠으로 느껴졌다. 기념관을 만들어 유대인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인에게 전시용이고, 즉 무관심의 영역이 되어버렸고 과거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 지금은 가해자가 되었다는 걸(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비판했다.) 나타내려고 한 것 같은데 창작자의 의도가 너무 드러나 버려서 줄곧 절제의 형식미를 지켜온 영화 흐름에 구멍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근데 이것 외에는 정말 지적할 게 없어서 수많은 평론가에게 만점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
영화의 구조를 기하에 비유하면 상하, 좌우, 순환, 포함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네 가지 개념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하고 그 이미지에 따라 미장센이 표현되었다. 일단 '좌우'부터 말하겠다. 영화를 한 번 본 거라서 '좌우'에 대한 상징은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짧게 설명하고 넘어가기 위함이다. 왠지 '좌'는 부정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회스 가족이 정원에서 놀 때 담장 너머로 유대인을 태운 기차가 흰 연기를 뿜으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온다. 기차가 왼쪽으로 온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므로 '악'과 '죽음' 같은 부정적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초반에 유대인 노동자가 수레를 끌고 회스 가족의 저택으로 올 때 왼쪽으로 이동한다(강제 노동이기 때문에 부정적 의미). 남편의 전출 소식을 듣고 헤트비히가 루돌프를 쫓아갈 때 수용소 담벼락 앞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강변에서 부부가 타협의 대화를 나눌 때 루돌프는 왼쪽에 있다(유수의 방향도 왼쪽). 다른 지역으로 전근 간 루돌프는 출근할 때도 왼쪽으로 이동한다. 그가 아들과 풀숲에서 말을 탈 때도 왼쪽으로 이동. 지도에서 독일이 폴란드의 왼쪽에 있기 때문에 그 방향은 나치와 관련 있고 그러므로 부정적 의미를 갖는 듯하다.
순환과 포함은 의미가 비슷하다. 세상의 악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것이고(순환) 이 악보다 더 큰 악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포함). 즉, 악은 영원하고 확장한다. 순환의 상징은 루돌프가 집에 방문한 사업가에게 들었던 시체소각장의 방식에 나타난다. 사업가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적재물(유대인)을 소각하고 냉각하는 일이 끊임없이 진행된다고 말한다. 나치를 상징하는 문양, 하켄크로이츠는 바람개비처럼 돌려도 같은 모양이다. 오프닝의 암흑은 엔딩의 암흑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의 비명임을 짐작케 하고 엔딩에서 들리는 소리(음악)는 실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소음(사고와 폭동)을 수집해 만든 것이다. 오프닝의 비명은 새소리와 물소리로 변하며 초록 풀의 강가에서 소풍을 즐기는 회스 가족이 첫 장면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나치의 정책 때문에 루돌프는 가족과 떨어져 전근을 가고(가족 해체는 부정적 의미) 마지막 장면에서 파티장 건물의 계단을 홀로 내려가며 깊숙한 어둠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암흑과 크레딧. 한층 무서워진 비명의 음악. 이 처음과 끝의 수미상관은 '순환'뿐 아니라 '포함'의 개념도 나타낸다. 아우슈비츠의 비명이 더 증폭된 비명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포함'은 기존의 것보다 더 큰 것을 수반한다. 그리고 그 큰 것도 그보다 더 큰 것에 의해 종속된다. 그러니까 '포함'은 '모방'과 '확장'도 되는 것이다. 마지막 신에서 루돌프가 건물 계단을 내려갈 때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이 있고 또 거기에 더 작은 사각형이 있는 무늬가 복도 바닥에 새겨져 있다. 마트료시카 같은 그것은 하나의 작은 악이 있다면 그것보다 큰 악이 외부에 있고 또 그 외부에도 더 큰 악이 있음을 의미한다.
회스 저택의 사각형 정원에는 사각형 수영장이 있다. 그럼 회스 저택의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니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세력이 있다. 그 큰 악의 사각형(수사적 표현)이 사각형 회스 저택을 가두고 있고 회스 저택은 사각형 수영장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나치 - 회스 - 수영장.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회스 저택의 '너머'로 느껴지지만 사실 나치의 사각형 안에 가두어진 종속 공간인 것이다. 영화 후반에 겨울이 되고 사각형 수영장에 두 아들만 놀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누나들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들린다(가족 해체).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을 비닐하우스로 데려가 수용소에 유대인을 가두듯이 동생을 감금한다. 제일 작은 사각형(수영장)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중간 사각형(회스 저택)에서 악행을 모방한 것이다. 그들이 더 커서 저택 밖으로 나가면, 즉 가장 큰 사각형에 포함되면(아빠처럼 나치의 일원이 되면) 수용소에서 실제로 사람을 감금하고 학살하게 되는 것이다. 재밌게도 첫째 아들은 아빠 루돌프와 말을 탈 때 지휘관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되고 싶다 말한다. 사각형(지휘관) 밖의 더 큰 사각형(지휘관을 지휘하는 지휘관). 이렇게 '순환'과 '포함'의 상징은 악이 되풀이되고 진화한다는 메시지를 세련되게 드러낸다.
이 장면이 얼마나 대단한 연출인지 느껴보자. 사각형 안의 사각형, 사각형 밖의 사각형.
마지막으로 '상하' 구조에 대해 말하자면, 영화에서 위는 권위, 영광, 행복, 여유 같은 긍정적 의미고(주인공 회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래는 고통, 죽음, 열등, 거짓 같은 부정적 의미다. 앞서 말했던 오프닝과 엔딩을 다시 떠올려보자. 암흑에서 회스 가족의 소풍 장면이 나오고 그들은 물놀이를 즐긴 뒤 집에 가기 위해 숲을 오른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자신들의 저택. 영화는 그들의 넉넉한 일상을 보여준다. 위의 장소(숲을 오름)가 긍정적 느낌을 주는 것이다. 반면에 엔딩에서 회스는 자신을 별로 반기지 않는 아내와의 통화를 끊고 홀로 계단을 내려간다. 그는 대총통(히틀러)이 이번 작전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줬다며 자랑하지만 아내는 공감해주지 않고 고작 그걸로 자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느냐고 불평한다. 혼자 헛구역질까지 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오프닝에서 가족과 단란하게 있었던 모습과 크게 비교된다. 그 하강의 행동(계단을 내려감)은 가족과 소원해진 그의 처지를 통해 부정적 의미임이 재확인되고, 그가 계단 아래의 어둠으로 사라진 뒤 영화가 끝나고 검은 화면의 크레딧에서 흐르는 음악은 오프닝 암흑의 비명처럼 고통스럽고 공포스럽다. 즉, 가장 처음의 어둠에 고통과 절규가 있었고(아우슈비츠 수용자의 죽음과 강제 노동), 그 'the zone of interest'의 부당한 희생을 통해 나치 장교의 가족이 위에서(숲을 오름) 정원의 삶을 살 수 있었고, 나중에 나치 장교는 전근 때문에 가족과 멀어지는 불행을 겪고 게다가 통화한 아내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결국 혼자 쓸쓸히 파티장(나치의 영광)의 계단을 내려가(나치의 몰락) 마지막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가장 낮은 곳에서 증폭된 비명(아우슈비츠의 고통뿐 아니라 그 뒤 현 세계의 고통까지 포함)이 지속된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니까 위는 나치의 부정한 행복의 공간이고 아래는 유대인의 부당한 불행의 공간이다. 헤트비히가 그렇게 자랑하는 정원의 꽃들은 처형당한 유대인들의 뼛가루(비료) 위에서 성장한 것이다. 또, 회스 저택의 유대인 가정부들은 주로 1층(아래)에서 일하고 회스 가족의 방은 2층(위)에 있다. 루돌프가 비밀리에 그의 사무실에 들어온 유대인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은 뒤 향하는 곳은 지하(아래)의 개인 공간이다. 거기서 성기를 닦는데, 부정한 짓(외도)의 결과를 지하에서 처리했으므로 아래의 공간은 결코 좋은 뜻을 가지지 못한다. 남자 유대인 노동자가 헤트비히와 담배 피울 때, 마주하는 것을 피하려고 잠깐 자세를 낮추자 헤트비히가 맞담배 피워도 괜찮다는 식으로 그를 일으킨다. 아래에서 위로 자세가 높아진 것이므로 그 장면은, 어쩌면 남자 노동자가 헤트비히의 내연남일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그녀가 바람났으니까 먼 곳에서 걸려온 남편(루돌프)의 전화도 별로 반기지 않은 것이다.
색깔이 화면 전체에 물드는 장면이 있다. 오프닝과 엔딩의 검은 화면은 이미 얘기했다. 루돌프가 수용소의 소각 장면을 볼 때 연기가 자욱해지며 화면이 하얗게 된다. 꽃들을 보여주는 신에서도 빨간 꽃과 함께 화면이 빨갛게 물든다. 검정, 하양, 빨강. 이것은 무슨 뜻일까? 나치 국기를 의미한다. 하켄크로이츠가 검정, 하양, 빨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 또한 일치한다. 만자(卍)를 45도 기울인 형태가 검정, 그것을 담고 있는 원이 하양, 깃발의 사각형 바탕이 빨강. 여기서 그치지 않고 루돌프는 정원에서 하얀 옷을 입고, 헤트비히는 자기 엄마가 집에 놀러 왔을 때 분홍(빨강) 옷을 입고, 또 그 엄마는 어두운 회색 혹은 감색(즉 검정) 옷을 입고 있다.
글을 쓰며 곱씹을수록 이 영화는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 빠따 쳐야 한다는 게 농담이 아니다. <추락의 해부>도 훌륭한 영화인데 이 '존 오브'에 비하면 소재의 참신함과 작품의 시의성 측면에서 확실히 달린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이 정도로 예술적으로 표현한 영화는 이제껏 없었다. 나는 엔딩 크레딧의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영화관을 그냥 나가고 싶었다. 귀신 소리 듣는 것처럼 무서웠기 때문이다. 상영관에 총 네 명 있었는데 만약 나 혼자 봤다면 끝까지 참지 못하고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실제 역사의 비극을 생생하게 잘 드러냈다. 엔딩 음악을 듣고 공포를 느낀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헛구역질한 루돌프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