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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Sep 26. 2024

수유천 (By the Stream)

김민희 연기 정말 잘함


1.

지금까지 본 홍상수 영화 중 가장 어려웠다. 그의 영화는 이제 구조주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 치밀하게 계산된 서사와 대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후부터 흐릿해졌다. 유준상이 방송에 나와 한 말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서>는 즉흥으로 준비한 소품(텐트와 랜턴)이 영화의 핵심 소재가 되었다. 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촬영 전날에 쓴다고 하는데, 탄탄한 각본과 그로 인한 논리적 해석은 이제 그의 영화에서 볼 수 없을 듯싶다.

하지만 이게 그의 퇴보를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다. '계획'보다 '즉흥'의 느낌이 강한 요즘 작품은 무능력과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라 창작의 진보와 세계관의 성장이 가져온 결과다.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해지고자 했던 '구경남'은 세상의 근원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한 '전임'이 되었다. 마른 늪에서 고기를 낚은 것이다. 전임이 마지막에 지은 미소는 드디어 알게 된 자의 기쁨이다. 창작에 대한 변화와 고민이 답과 확신을 얻어 한층 높은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비열하고 위선적인 돼지들, 사랑했던 여학생을 잊고자 강원도로 섹스 여행을 떠난 교수, 자신의 순결을 남성의 경제력과 교환해 잿빛 현실을 벗어난 수정이. 홍상수의 최근 작품에는 이런 것들이 노골적이고 의도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을 비판하고 조롱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영화가 출발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눈이 순해졌다고 해야 하나. 패기 넘치는 젊은 예술가의 날카로움이 마음 넓은 노장의 세련된 절제로 발전한 느낌이다. 즉흥과 우연이 카메라에 만들어 낸 구체적 장면은 감독의 의도가 없어도 우리가 사는 자연과 세상처럼 오묘한 패턴을 담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래서 작품이라기보다 자연에 가깝다. 다른 감독에게 영화 찍는 것은 생산이고 설교지만 홍상수에게는 탐구이고 구도다. 밖으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안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학자가 인간과 세상을 연구해 법칙을 발견하듯이 카메라로 인간과 세상을 찍으며 그 속의 패턴을 담아낸다. 그래서 갈수록 그의 영화는 어렵다.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구조가 없으니까 관객은 해석의 갈피를 잃는다. 배우들이 술 마시고 떠드는 모습이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어서, 우리가 세상은 무엇이고 왜 사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의 영화도 알쏭달쏭하다.


2.

패턴(주제나 의도)을 풀이하려고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영화를 만들면서 패턴을 발견하는 것. 작가 개인의 관념이나 추상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찍은 실물을 통해 유의미함을 얻도록 하는 것.


3.

개인적으로 반가운 영화였다. 촬영 장소인 덕성여대가 내가 많이 가본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가 그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교내도 들어가 보고 정문 앞의 다리(근화교, 영화에서 전임과 외삼촌이 처음 만난 곳)에서도 여자 친구를 기다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덕성여대 근방에 4.19민주묘지와 우이동계곡이 있어 학교 분위기가 한적하고 상쾌하다. 자연에 둘러싸여 정말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대학. 교수, 학생, 예술가가 주로 등장하는 홍상수 영화에 최적인 장소. 내가 만약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면 덕성여대에서 오래 일하고 싶다. 계곡이 흐르는 식당에서 장어를 먹고, 건물 옥상에서 바람을 쐬며 잠들고, 학교 근처의 복층 집에서 산을 보며 사는 게 십분 이해됐다. 그 감성을, 나도 그 지역에서 노닐었으니까 알 것 같았다.


4.

수유천 다리에서 만난 전임과 외삼촌은 오랜만에 서로의 근황을 묻는다. 전임은 개천에서 작업을 하고 올라왔기 때문에 손에 팔레트를 들고 있던 상태다. 그렇게 작은 걸로 어떻게 그림을 그리느냐고 외삼촌이 묻자 선물 받은 건데 이 정도면 괜찮다고 전임이 답한다. 이건 홍상수의 영화 촬영 방식에 대한 비유다. 팔레트는 카메라를 상징한다. 작아도 쓸 만한 색은 다 담을 수 있다. 홍상수는 예쁜 장면을 찍거나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하지 않는다. 전임은 물결의 패턴을 파악하는 게 목적이기에 큰 팔레트와 다양한 색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홍상수는 인터뷰에서 화가들은 혼자 매일 일할 수 있으니까 그들의 작업 방식을 부러워한다고, 촬영에 사용된 카메라는 10년 전 독일에서 산 것인데 작은 사이즈고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전임의 팔레트는 홍상수의 미니멀리즘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렇게 간소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대상의 본질(패턴)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 세잔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홍상수의 영화가 어려워진 이유는 종교 색채가 진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작 <여행자의 필요>가 불교적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 <수유천>은 기독교적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찍은 것 같지만 은밀하게 기독교에 관련한 요소가 숨어 있다.

일단 전임(김민희)은 성모 마리아다.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다음의 설명을 들어보길 바란다. 전임은 외삼촌과 정 교수와 술을 마시다가 과거에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한다. 공대에 입학했다가 눈에서 며칠 동안 피가 나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병원 치료도 소용없었다는 얘기. 어느 날, 감은 눈에서 파란 하늘이 보였고 피가 멈추었다고 했다. 나는 '피 눈물'을 듣자마자 성모 마리아가 떠올랐고(외국 어느 지방에서 마리아 상이 피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 파란 하늘을 본 뒤 피가 멈추었다는 걸 통해, 파란 하늘은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니까 이 영화가 기독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다.

성경에서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도 바다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파란색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사용돼 왔다. 마리아가 걸친 파란색 옷은 속세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멀리하고 신성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전임이 파란 하늘을 보고 눈이 나았다는 것은 매우 노골적인 표현으로, 그녀가 하느님을 영접하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그녀가 술자리에서 얘기한 기적 체험은 사실 간증이었던 셈이다. 근데 애초에 왜 피 눈물을 흘렸던 걸까? 마리아 상이 피를 흘리는 건 잘못돼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경고다. 전임은 공대를 갔기 때문에 눈에서 피가 났던 것이다. 왜냐하면 공대는 남초 집단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고 이성 관계로부터 순결해야 하는 그녀가 남자 넘치는 곳에 갔으니 하늘이 잘못된 인생 경로를 경고하고자 그녀에게 피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다. 그래서 전임은 파란 하늘(하느님)을 본 뒤 학교를 자퇴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행운을 경험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남자를 멀리했으니 그 보상으로 순탄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결국 그녀가 종착한 곳은 여대다. 남자의 출입을 원칙적으로 금하는 여자 대학. 공대와 대조되는 그 여초 집단은 마치 수녀원을 연상시킨다. 교수인 전임은 성모 마리아, 그녀를 따르는 여학생들은 수녀. 한 친구가 밤에 연출 남학생(하성국)과 얘기하러 사라졌을 때 왜 두 여학생이 전임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는지, 그들의 관계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남자관계 때문에 상처 받은 그 세 여학생이 학교 잔디밭에서 등(기독교의 촛불) 하나 켜고 자는 전임에게 위로 받았던 것과 그때 전임이 "편안해져라."라고 말한 것도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전임이 연출 남학생의 출입을 의심하고 그를 내쫓으려고 경비에게 전화를 건 것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기적 체험을 얘기한 술자리에서 현재 만나는 남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전임은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 지금은 깨끗하다고 말한다.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듯 깨끗함을 강조한 것이다. 게다가 정 교수는 10억을 모았다고 자랑하고 학교 근처의 좋은 집을 전세로 마련했지만 전임은 가난해 보이고 집 없이 밖에서 잔다. 영화에서 그녀가 자는 장소는 딱 두 번 나온다. 교내 잔디밭과 건물 옥상. 전자는 수녀원을 상징하니까 쉽게 이해되고 후자는 정 교수의 복층 집과 비교해봐야 그 의미가 도출된다. 2차로 가서 떡볶이를 먹은 그 집에서 정 교수는 외삼촌(권해효)과 위층으로 올라가 달 구경을 핑계로 밀애를 즐긴다.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 올라가지 않는다. 전임의 시점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전히 아래층에 머물러 위층에서 일어날 일을 관객에게 짐작시킬 뿐이다. 정 교수의 위층과 전임의 옥상은 높은 곳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나 그 질적 성격은, 전자는 남의 시선을 피해 욕망을 즐기는 속(俗)의 장소고 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최대한 가깝게 쉬려고 하는 성(聖)의 장소라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영화 포스터에 전임이 베틀을 짜는 모습이 담겨 있다. 강의 흐름을 패턴으로 형상화해 그걸로 직물을 만드는 게 그녀의 작업 방식이다. 근데 이 베틀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전임이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는 것에 힘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쓰인 소품이다. 왜냐하면 수태고지의 성화에 마리아가 주로 독서를 하거나 실을 뽑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구세주를 위한 옷감으로서 그와 마리아의 생명이 연결돼 있음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짚을 부분은 술자리 삼인방이 정 교수의 집에 처음 들어갈 때 하얀 성모상이 거실 입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장면은 전임이 기적 체험을 얘기한 직후다.

이렇게 설명했는데도 납득 못 할까 봐 사진을 첨부한다. 성모 마리아의 파란색과 빨간색. 전임의 파란 카디건과 빨간 스웨터. (그리고 아이보리 바지.)


6.

홍상수 영화는 늘 자기 얘기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지금 보면 가장 덜 홍상수스러운 영화고 <강원도의 힘>부터 그 자기 얘기 하는 농도가 점점 짙어졌다. 이 영화 <수유천>은 농도 100% 자기 얘기라 해도 무방하다. 일단은 김민희와의 불륜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은 자신의 처지가, 정부를 비판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방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외삼촌의 상황으로 비유된다. 전임은 외삼촌과 정 교수가 사귀게 된 것을 알고 그래도 되느냐(바람피워도 되느냐) 하는 식으로 말하는데 외삼촌은 아내와 이미 이혼했고 별거한 지 10년 되니까 법원에서 알아서 이혼 신청 받아준 사실을 밝힌다. 실제 현실에서 아내와의 별거 기간을 늘려 자동적으로 이혼이 되길 바라는 홍상수의 심정이 아닐까 싶다.

외삼촌이 촌극을 맡기 전에 원래 연출을 했던 남학생은 그냥 젊은 남자가 아니라 과거의 홍상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촌극 참여 학생 중 셋과 동시에 연애를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어 연출 자리가 외삼촌으로 바뀐 건데 그렇다면 외삼촌은 현재의 홍상수라고 볼 수 있다. 재밌게도 극 중 외삼촌은 20년 전에 같은 학교에서 촌극을 연출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남학생은 더 과거의 홍상수고 외삼촌은 더 현재의 홍상수인 것이다.

남학생은 동시에 만난 세 여학생 중 하나를 불러 자신이 곧 유학을 떠나는데 결혼을 해서 함께 외국으로 가자고 말한다. 전임과 나머지 두 여학생은 프러포즈 받은 학생을 통해 그 얘길 듣고 어처구니없음을 느낀다. 여럿과 바람피우고 개중 하나에게 청혼한 남학생을 욕하고 비난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당사자 여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좋아할 수도 있죠." 이건 김민희와의 사랑에 왈가왈부하는 대중이 이제 그만 신경 꺼주었으면 좋겠다는 홍상수의 전언이다. 남녀가 만날 때 정말 주변에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면 그 둘은 쉽게 사랑할 수 있다.

프러포즈한 남학생이 과거의 홍상수를 상징한다고 했다. 실제로 홍상수는 현재 별거 중인 아내와 미국 유학 중에,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결혼했다. 외삼촌이 남학생을 따로 불러 둘이 얘기를 나누자고 하는데 그 장면은 현재의 홍상수가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법적 아내와 별거하고 김민희와 불륜 커플이 된 지금의 홍상수가, 젊었을 때 아내와 결혼할 것을 결심한 과거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건 영화의 해석과 무관하지만 한번 생각해본다면 두 가지로 추릴 수 있다. 하나는 미래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지금 굳이 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고 많은 여자를 만나보라는 것. 홍상수가 자기 딸에게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음을 알렸을 때, 많은 이성을 만나보고 진짜 행복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외삼촌이 남학생에게 정말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 이건 결혼을 후회하고 딸마저 부정하는 뚯이 되는데, 외삼촌이 촌극 뒤풀이에서 젊을 적 연출을 맡았을 때 한 여학생(아내)을 만났는데 그때 자기가 그녀에게 못되게 굴었다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걸로 보아 결혼을 반대한 게 아니라 찬성하되 먼 미래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결혼 생활 중에 아내를 많이 사랑해주라고 조언한 것일 확률이 높다. 젊었을 적 연인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스러움은 별거 중인 아내를 향한 홍상수의 마음이다.

"그래, 사랑하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 전임은 프러포즈 받은 여학생의 말("우리가 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을 듣고 공감하듯이 그렇게 말한다. 홍상수와 김민희의 자기 변호인데, 제삼자인 나로서는 동감과 반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근데 나중에 홍상수가 김민희와 헤어지고 아내와 딸에게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 있다. 왜냐하면 그때의 영화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가정 버리고 새 여자에게 갔다가 본래 자리로 돌아온 홍상수는 어떤 영화를 만들까?


7.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두 장면이 있다. 모두 전임의 세 학생과 관련된 건데, 밤에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앉아 전임이 학생들을 위로하는 장면과 프러포즈 받은 학생 주위로 모여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장면이다. 둘 다 밤에 찍었는데 배우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최소의 조명만 사용했다. 어둡지만 따뜻한 느낌이 들어 인상적이었다.


8.

촌극은 군대가 동원된 정치적 상황인 듯하다. 우리 현대사의 어떤 사건인데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배우로 출연한 한 학생이 객석을 등지고 앉았는데, 관객의 반응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홍 감독의 의도가 느껴졌다. 물론 가장 키 큰 학생이 한번 고개를 들어 객석을 살피는 연기 지도를 받는데, 그래도 자신의 팬을 생각해주는 홍 감독의 마음이 전해졌다.

촌극의 정치성 때문에 정 교수와 전임은 총장실에 불려 간다. 전임은 뒤풀이 자리에서 학교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낙엽 떨어뜨린 큰 나무의 잎을 주워 허공을 휘젓는다. 그녀는 총장실에서 꾸지람 들어도 속세의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가 잎을 가지고 노는 것은 물을 관찰해 패턴을 파악하는 작업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잎을 통해 바람의 패턴을 느껴본 것이다. 전임은 인간사의 권력관계에 관심 없다. 그녀는 자연에서 도를 찾는 예술가다.


9.

실물에서 패턴을 얻는 전임은 작업에 들어가기 전 어떠한 의도와 관념도 갖지 않는다.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발견의 순간이라고 역설했던 구경남처럼 그녀도 강물을 무심히 관찰하는 데서 시작한다. 작가의 교훈과 메시지가 선재하면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패턴)을 획득하고 표현할 수 없다. 홍상수는 자신은 주제나 메시지로 시작하지 않고, 의도가 명확할수록 모든 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작품의 줄기가 없으면 창작 단계에서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컨트롤하지 않아도 '과정'이 계속 무엇을 발견하게 하고 자신은 그걸 수렴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면 된다는 게 홍 감독의 생각이다. 원론적인 창작 방식의 대척점에 있는 이 방법론은 사실 원론을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게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원론을 업그레이드한 상위 방식에 가깝다. 홍상수는 창작에 주제와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게 아니다. 작가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쓰는 것마다, 찍는 것마다, 그리는 것마다 자연스럽게 패턴에 가닿는다. 깨달은 사람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어도 늘 도를 잃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세상에 대해 알 만큼 아니까 자신 있게 '우연'과 '즉흥'으로 작업해도 새롭고 신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모르는 놈이 홍상수의 말을 쉽게 받아들여 그냥 기분 끌리는 대로 아무거나 찍으면 절대 홍상수의 10분의 1도 얻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란 제목은 자신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자랑이기도 하다.

아는 상태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화(<강원도의 힘> <오! 수정>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를 만들어 냈던 홍상수는 자신의 창작 방식에 권태와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컨트롤하지 않고 그냥 이 세계에 카메라를 던져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라 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후부터 확실히 그의 영화에 즉흥과 우연이 많아졌다. 옛날에는 대사의 토씨 하나 틀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가 지금은 애드리브까지 허용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건, 다시 말하지만 정말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하는 게 아니다. 그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뉴턴이 거인의 어깨를 언급한 것처럼 겸손함에 가깝다. 진리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은 적다고, 그걸 '모른다'는 표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은 책 한 권 읽고 양자 역학에 대해 교양 수준으로 떠들지만 똑똑한 사람은 연구실에서 묵묵히 양자 역학을 연구한다.

홍상수는 잘난 척하지 않고 '연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 많이 알기 위해 몇 가지 조건만 가지고 카메라로 실물(자연과 인간)을 관찰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이 그의 영화를 존재하게 해주는 요소다. 그에게 영화란 이제, 내가 이만큼 안다고 자랑하는 장이 아니라 내가 이만큼 모르니까 더 공부하는 장이다. 예술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도적 느낌과 종교적 색채가 진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한강에서 시작해 중랑천을 거쳐 수유천에 이른 전임은 장어집 옆을 흐르는 계곡이 수유천의 수원이라는 얘길 듣고 급하게 그곳 상류로 올라가본다. 한강, 중랑천, 수유천, 그리고 수원지. 이렇게 근원으로 올라가려는 그녀의 경로는 물의 패턴을 만들어 내는 자연 속에 어떤 출발점이나 유의미한 현상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예술혼의 발로다. 만약 수원지에 어떤 출발점(주제)이나 유의미한 현상(메시지)이 있다면 전임(홍상수)의 창작 방식은 틀린 게 된다. 자연의 '상류'에 패턴을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게 있다는 건 자연 속에서 예술을 하는 인간도 어떤 근본에서 출발해 창작해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상류'에 아무것도 없다면 인간은 자유다. 어떤 출발점 없이도 자연에서 패턴이 만들어지므로 인간도 예술을 할 때 근본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하나의 주제나 메시지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패턴이 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찾는 외삼촌의 외침에 전임은 아무것도 없다고,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내려온다. 수유천의 수원(상류)에 어떤 출발점이나 유의미한 현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예술을 할 때 주제나 메시지를 가질 필요가 없음을 눈으로 직접 보고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창작 방식이 옳았음을 확인한 것. 그래서 자유를 얻은 전임은 해맑게 웃고 영화는 그 미소를 정지시킨 채 끝난다. 김민희의 웃는 얼굴은 관객에게 자유를 느끼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10.

진리(패턴)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거창하게 그것의 원류가 되는 출발점이 없는 것. 자연은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떤 주제나 메시지를 가지고 생성된 것이 아님. 그저 규칙과 법칙이 범신론의 설명처럼 자연에 널리 숨어 있는 것임. 그래서 거창한 주제나 의도를 가지지 않아도 자연의 패턴을 예술에 담아낼 수 있음. 그리고 그렇게 주제 없이 들어가는 건 끊임없는 발견의 과정임.


11.

작가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논리적으로 잘못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 그 작품은 자연(패턴)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12.

"너 인생에 대해 뭐 좀 알아? 인간과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무슨 메시지를 전한다고 예술을 하고 있어. 거만하게 굴지 말고 좀 겸손해져. 난 모르면 모른다 하고 알기 위해 예술 할 테니까."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제(?).


13.

정 교수의 사무실에 걸려 있던 작품은 각기 다른 세 가지 것이었다. 남학생과 스캔들이 있었던 여학생의 수, 세 명. 전임이 물의 흐름을 관찰한 곳, 한강, 중랑천, 수유천.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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