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심플한 퀴어 영화
좋았던 점은 일단 심플하다는 것. 영화의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이 모두 간결하다. 카메라가 대상을 과장하지 않고(클로즈업과 미디엄숏이 덤덤하게 인물을 비춘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도 복잡하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성 정체성에 관한 극영화라고 하면 가부장적 제도, 권위적인 부모, 남성성과 여성성 중 어느 한쪽을 강요받는 주인공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뻔한 설정은 긴장과 재미는 있을지언정 리얼리즘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고,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의 순수성에도 지장을 준다. 셀린 시아마의 성장 3부작 중 하나인 이 <톰보이>는 제목만 그 의도가 강하지 영화 자체는 담백하고 개방적이다. 개방적이란 표현은 교조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감독이 관객에게 어떤 가치나 사상을 주입하지 않는다. 대개의 퀴어 영화는 성 소수자를 의도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놓아 비판할 수 없게 만들고, 동성애를 이성애보다 절절하게 그려 마치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한 사랑임을 주장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 영화에서는 '톰보이'에 대한 편애나 배려가 없다. 남자 같은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게 맞고 그의 우정과 사랑을 다루지만 그런 소수의 취향이 다수의 것만큼 옳고 그러니까 사회에서 인정해줘야 한다는, 소수자 영화 특유의 역설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이 영화 감상을 편하게 만든다. 밖에서 자신을 남자아이 이름인 미카엘이라고 소개하는 로레는 어느 레즈비언 관객의 어린 시절이고 어느 게이 관객의 어린 시절도 되고 심지어 어느 스트레이트 관객의 어린 시절이기도 하다.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누구나 로레에게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이게 이 영화의 가장 긍정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애와 동성애를 나누고 한쪽에게 억압의 이미지를, 다른 쪽에게 저항의 이미지를 씌워 둘을 대립시키는 피곤함과 억지스러움. 그런 것과 거리가 머니까 친구를 좋아했던 추억을 가진 이라면 영화가 따뜻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나빴던 점은 제목이 '톰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터에 한 아이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톰보이의 뜻을 안다면 누구나 이 영화가 남자 같은 여자아이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포스터의 아이가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자마자 '아, 얘는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데 웃긴 게 그 애가 여자라는 사실이 영화의 반전이라는 것이다. 미카엘이 여자였음이 밝혀지면서 영화의 내러티브가 절정을 거치게 된다. 이 성별 반전이 스토리의 변곡점이고 등장인물 간의 갈등과 관객이 느끼는 흥미가 폭발하는 사건인데, 이미 영화 제목을 통해 반전의 내용을 알아서 놀라움과 기대감 같은 게 일어나지 않는다.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말. 심지어 나는 영화 속 인물들이 미카엘이 여자라는 걸 애초에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리사가 미카엘이 여자라는 걸 알고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 동네 친구들도 미카엘이 짧은 머리의 여자애라는 걸 알고 있다 생각했다.
내가 감독이었으면 영화 제목을 '로레'라고 지었을 것이다. 남자 같은 여자인 자신을 세상이 이해해줄 것 같지 않아서 미카엘이란 가명을 쓴 주인공, 그녀의 진짜 이름은 로레. 미카엘은 성 정체성을 감춘 자아고 로레는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낸 자아다. 영화는 마지막에 로레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면서 끝난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하는 리사의 물음은 남자 같은 여자의, 즉 톰보이의 성 정체성도 한 사람의 개성으로서 존중할 수 있음을 뜻한다. 로레는 수줍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커밍아웃을 한다. 성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게 모든 소수자의 염원일 것이다. 로레는 단순히 주인공의 실명일 뿐 아니라 그녀의 인정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톰보이'가 아니라 '로레'여야 했다. '톰보이'는 노골적인 단어라 영화의 세련됨을 떨어뜨린다.
빨강은 여자, 파랑은 남자. 우리 현실에서 통상적으로 인식되는 상징이지만 영화에서도 그렇게 쓰인다. 오프닝 크레딧에서 tomboy란 제목이 빨강과 파랑으로 한 번씩 비쳤다가 두 색이 함께 들어간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이는 주인공 로레의 성 정체성을 뜻하는 것으로 그녀에게 여성성과 남성성이 함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몸은 여자(빨강)지만 맘은 남자(파랑)라는 것이다.
짧은 머리를 하고, 방의 벽지가 파란색이고, 운전과 축구를 좋아하고, 알록달록한 끈의 목걸이를 싫어하는 로레라서, 즉 그만큼 남성적이라서 여성을 상징하는 빨간색이 거부되고 파란색이 선호될 것 같지만 영화에서 두 색은 어느 하나 차별당하는 것 없이 두루 쓰인다. 로레는 위아래로 빨강과 파랑을 같이 입기도 하는데 이는 영화가 그만큼 관용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톰보이'라서 주인공이 파랑을 고집하거나 부모가 빨강을 강요하는 장면 같은 건 없다. 로레는 육체적으로 여성이고 정신적으로 남성이기에 아니, 두 성질이 한 몸에 공존하기 때문에 빨강과 파랑 중 어느 하나를 우대하거나 홀대하지 않는다.
파란 원피스의 경우가 조금 특이한데, 로레는 미카엘이라는 남자애 행세를 한 게 발각되어 엄마로부터 파란 원피스를 강제로 입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여성임을 자백하는 원피스 꼴로 리사를 대면한 게 부끄러워서 숲으로 도망치고 거기서 한참 고민하다 원피스를 벗어 나무에 건다. 색은 남성을 상징하는 파랑인데 모양은 여성을 상징하는 원피스라서 로레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예 빨강 원피스였다면 자신이 사실 여자였음을 이실직고하는 미안함과 시원함의 감정을 느꼈을 텐데 색과 모양이 서로 다른 성을 나타내는 그 옷은 여자인 로레가 남자로 거짓 행세를 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너 여자(원피스)인데 왜 남자(파랑)인 척했어?
새 식구가 태어난다. 임신했던 엄마가 출산을 한 것이다. 아기는 노란색 옷을 입고 있다. 노랑은 빨강과 파랑 이전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처음 상태를 의미한다. 나는 분명히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기는 커서 로레처럼 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고 로레의 동생 잔처럼 여성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엄마와 아빠는 로레의 특별함(톰보이)을 이해하고 받아주었으니 아기의 성향도 존중해줄 것이다. 중요한 건 아기가 태어난 후에 로레가 더 바깥 사회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잔을 돌보느라 밖에 나가 친구들과 잘 놀지 못했다. 영화 초반에 잔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로레가 밖으로 나간 장면은 예사로운 게 아니다. 이제 아기가 태어났고 로레가 잔에게 했던 것처럼 잔이 그 아기를 돌봐야 하니 로레는 업무를 인계한 것처럼 집에서 동생 돌보는 일에서 벗어나 밖에서 친구들과 오래 지낼 수 있다. 언니의 역할은 잔이 하고 로레는 어른이 되기 위해 사회 경험을 하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리사가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고 로레가 집에서 나와 그녀를 만나는 장면은, 그리고 이름을 물어보고 답하는 그것은 우리 사회가 로레 같은 이들을 친구처럼 편하게 받아주길 바라는 감독의 소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