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뜨개질이 하고 싶었다. 출퇴근길 수없이 봐왔던 우리 동네 빛바랜 간판의 작은 뜨개방이 그날따라 달리 보였다. 퇴근 후 무작정 들어간 뜨개방에는 중장년의 여성 다섯 분이 수다를 떨며 무언가를 열심히 뜨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들어가니 모두가 나를 한번 쓱 쳐다보고 인사를 받아준 후 다시 본인들의 부지런한 손놀림에 집중한다. 뜨개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께 가서 나의 뚜렷한 목적을 말했다.
"저 완전 초보인데요, 카디건 뜨고 싶어서 왔어요."
"어떤 디자인으로 뜨고 싶은데요?"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도안도 없는데 뜨개선생님 머릿속에는 이미 뜨개 디자인이 척척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색만 고르면 되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선생님이 뜨고 계신 작품이 너무 예뻐서 저도 라벤더 색으로 카디건 뜨고 싶어요."
내 말을 듣고 실을 찾아보시더니 선생님이 고민 하셨다. 뜨개방에 있는 라벤더 색 실이 아무래도 카디건을 뜨기에는 부족한 듯 보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시며 알아보셨는데 라벤더 색 실을 확보하는 것은 실패였다. 비슷한 색이 아무리 많아도 실에 쓰여있는 번호가 다르면 색이 미묘하게 달라져 옷을 뜰 때는 확 티가 나 실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연한 브라운 색으로 할까 밤색으로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뜨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인디언핑크로 결정했다. 인디언핑크 색 실은 충분히 확보가 되어 다행이었다. 100% 울이면서 수입실이라 실값이 생각보다 비쌌다. 40g 1 타래당 13,000원. 실 12개와 10,000원짜리 좋은 바늘도 두 개도 구입하였다. 대신 수강료는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뜨개취미가 돈이 많이 들어 '방구석 골프'라는 별칭도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럼 저 이 분홍색으로 할게요."
여기저기서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도 그 색으로 떠서 며느리 줬는디 진짜 이뻐!"
"그 실은 그냥 보는 것보다 뜨면 더 예쁘고, 입으면 더욱더 예쁘네!"
"젊은 댁이 뜨개질 하러 왔구먼."
신입인 나에 대해 관심이 없는 듯 보여도 귀는 나에게 활짝 열려있었나 보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원하는 기장 길이만 물어보시고 내 몸 치수를 재셨다.
"길이는 어떻게 할까요?"
"전 상의를 짧게 입는 걸 좋아해서 짧게 하고 싶어요."
어깨, 몸통, 팔길이 등을 재시고 혼잣말인 듯 아닌 듯한 말을 한마디 하셨다.
"55? 55반? 나도 젊었을 때는 이랬는디 지금은 살이 쪄브렸어.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디..."
본격적으로 카디건을 뜨기 전에 게이지를 잡기 시작했다. 게이지란 인치 당 코의 수를 말하는데 실의 두께도 다르고 사람마다 손 땀이 다르므로 가로 세로 10cm 크기로 메리야스 뜨기를 하여 단위면적 안의 콧수를 세야 한다. 게이지를 내는 것은 전문가만 할 수 있는데 우리 뜨개방 선생님은 빈 종이에 치수와 디자인을 바로 적어내셨다.
치수를 낸 후 게이지를 해서 뜬 편물을 다 풀고 본격적으로 카디건 뜨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뜨개 초보자이므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뒤판을 뜨기 위해 고무 단을 7cm 뜨고 위로 쭉 30cm를 뜨면 뒤판이 어느 정도 보이게 된다. 숙제 아닌 숙제를 집으로 가져와 그날부터 계속 집에서 시간 날 때마다 뜨개를 하였다. 집안일을 끝내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밤 시간이 왔을 때 뜨개를 하면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드라마를 보거나 가족과 이야기를 할 때도 뜨개를 놓지 않았지만 서투른 실력과 2.5mm의 가느다란 바늘 때문에 진도가 더디었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이 하나도 없었고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힐링 그 자체였다. 요즘 2030 젊은 여성들이 왜 뜨개를 많이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느리지만 한코 한코 하다 보면 어느새 한 단이 되어있고 30cm까지 뜨게 되어 뜨개방에 다시 들렀다. 토요일 오전에 가니 벌써 많은 분들이 수다를 떨며 뜨개를 하고 계셨다.
"완전 초보자가 아닌디? 메리야스 뜨기(겉뜨기, 안뜨기를 한 단씩 반복하는 방법)가 제일 단순해 보여도 이렇게 고르게 하는게 엄청 어려운데 잘했네?"
선생님의 확인을 받은 후 나도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고 주제는 정치, 경제, 살림, 옛날이야기, 자식 이야기, 가족 이야기, 동네 세탁소 아저씨에 대한 약간의 험담, 음식, 연예인 이야기 등 매우 다양했다. 나는 대화에 낄 군번이 아닌 신입이고 내향인이므로 끼지 않지만 라디오를 틀어 놓은 것처럼 심심하지 않고 마냥 좋았다. 그러다가 한분이 말씀을 하실 때 단어가 생각이 안 나면 '가족오락관'의 퀴즈 맞추는 느낌처럼 단어를 말해드렸다.
"얼마 전에 우리 딸이 차를 샀는데 차도 크고 기름도 많이 먹는다네. 이름이 뭐더라..."
"카렌스? "
"아니~"
"제네시스?"
"응~ 맞아! 그것이 그렇게 기름을 많이 먹는다고 하더만!
한참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점심 밥때가 되었나 보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뜨개 숙제를 챙겨 들고 나오는데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뜨개방 한편에 주방과 평상이 있어 거기에서 밥때가 되면 다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 같았다. 한국인은 역시 정이다. 정겨운 말씀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으나 함께하기에는 아직 쑥스러워 다음에 함께하기로 하고 나왔다.
뜨개를 하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때를 조심하지 않으면 수면부족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다음날 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뜨개질을 밤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길에 뜨개방에 들르는 게 내 일상의 작은 활력이 되었다. 갈 때마다 보이는 분도 계시고 새롭게 보이는 분도 있다. 간식도 끊이질 않았다. 어떤 날에는 누군가 치킨을 시키고, 다른 날은 할머니 한분이 귤 한 상자를 가져오시기도 하였다. 사람이 많을 때는 여기저기서 오디오가 겹칠 때도 있지만 들으면서 뜨개질을 하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다는 뜻이다.
내가 우리 뜨개방의 좋은 점을 뽑으라면 첫 번째는 나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나이도 결혼여부도 직업도 묻지 않아 좋았다. 시간이 지나고 간식을 같이 먹으며 자연스럽게 공개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많이 물어보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아가씨인지 새댁인지 모르지만 젊은 댁이 뜨개질을 하니 좋네!"
"새댁은 아니고요 헌댁이에요!"
"아, 결혼은 했어요?"
"네~!"
대답을 하고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으니 아이 여부는 물어보지 않는다. 요즘에는 나이를 떠나 결혼을 안 하는 사람도 많고 결혼을 해도 자식이 없는 사람들도 있으니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조심하는 게 보여 좋았다. 그래서인지 엄마 또래의 회원분이 나이를 물어보아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이가 몇이여?"
"마흔 넷이에요!"
"오메, 우리 막내딸이랑 동갑이네!"
손이 그리 빠르지 않은 까닭으로 별로 남지 않은 올 가을에 카디건을 입을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지만 느리더라도 조금씩 완성이 되는 모습을 보니 마냥 신기하다. 처음에는 뒤판을 짜고 다음에는 앞판 두쪽을 짜고 지금은 소매를 짜고 있다. 뒤판과 앞판만 완성해서 연결한 편물을 몸에 걸쳐 보았는데 너무나 이뻤다. 이런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한 마디씩 해주신다. 너무나 정겨운 모습에 웃음이 난다.
"아따, 진짜로 예쁘네! 나도 저 색 짰는데 새댁이 입으니까 더 이쁘네!"
"옷이 쪼그만해서 아기 것인 줄 알았네."
"우리 나이에는 저렇게 짧게 못 입어."
한벌의 카디건이 완성되기까지 아직 갈길이 멀지만 조급하지 않다. 직장일, 집안일보다 뜨개가 우선이 될 수 없기에 속도도 더디다. 오히려 빨리 뜨다 보면 실수가 많아 푸는 일도 다반사이기에 차라리 한코 한코 정성을 들여 정석대로 가는 게 제일 안전하고 빠른 길일 수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러지 않을까? 느리더라도 꾸준함은 결국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완성된 후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면 일명 '세탁매직'이라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데 매우 설렌다. 실들이 정돈되어 옷이 예뻐 보이는 것이다. 자클한 느낌! 뜨개 선생님이 콧수 계산과 연결 부분을 도와주시긴 하지만 나의 피, 땀, 눈물(?)이 들어간 첫 작품이 완성되는 날 붕어빵이라도 사가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