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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강남탈출기

서울시민은 몽땅 투기판의 야바위꾼으로 변했다

  돌아보니 고마운 일이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나. 강남에 계속 살았더라면 나도 그들처럼 미친 굿판에 휘말렸을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오늘은 몇 억이 올랐을까를 노름판의 노름꾼처럼 벌게진 눈으로 뉴스를 보았을 것이다.


  부동산 정책이 바뀔 때마다 서울의 집값은 널뛰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서울 시민은 몽땅 투기판의 야바위꾼으로 변했다. 눈만 뜨면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십억 이십억이라는 아파트 시세에 눈이 뒤집힌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 하던 K씨는 일 년 만에 11억을 벌었다. 차액을 기부한다는데 위정자들이 불리해지면 기부한다고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그러나 정작 기부한 증서를 카메라 앞에 보여준 자를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말만 기부한다고 해 놓고 안 해도 누가 알겠는가.  


  - 너도 돈 있어 봐라, 안 그렇지.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없으니까 이런 말 할 수 있어 너무 좋다. 나도 여태 강남에 살고 있었으면 이런 말을 못 했을 것 아닌가. 


  강남 세브란스 병원과 매봉터널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아파트에 20여년을 살았다. 말하자면 길 건너편이 강남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이었다. 매봉터널 뚫는 공사는 천천히 진행 되었다. 그 앞의 공터는 아들이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노는 놀이터였다. 매봉터널(1992)이 뚫린 후  도곡동 타워팰리스(2002)를 분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아파트에서 가장 많은 소설을 썼다. 네 권의 장편소설과 한권의 소설집을 묶었다. 하얀 밤 홀로 깨어 문장을 만지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긴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린다. 저 울음소리는 젊은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을 때만 내지를 수 있는 단말마다. 


  창밖은 메타세콰이어가 도열해 있다. 겨울의 메타세콰이어는 살이 다 발린 채, 앙상한 가시만 남은 거대한 생선이 땅에 머리를 박고, 화석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가끔 창밖을 보며 오랜 옛날 옛적엔 이곳이 깊은 바다 속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 시절만 해도 부동산 정책이 이처럼 미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르다 내리다 했다. 내 아파트가 오르면 남의 아파트도 오르고, 내 아파트가 내리면 남의 아파트로 내리려니, 하고 살았다. 그러나 한 생을 살다보면 둥지를 이러저러한 이유로 옮기게 된다. 그 강남 세브란스 병원 앞 아파트의 반값으로 성남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14년을 살았다. 


  어느 순간 또 이사를 해야 할 때가 온다. 내 생의 마지막 이사는 이 지구를 떠나 우주의 어느 별,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성남 보다 싼 경기도 광주시로 왔다. 내 오피스텔이 있는 가락동까지는 여전히 차로 30분이면 된다. 서울과 위성도시를 잇는 간선도로가 이렇게 잘 연결돼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버스도 많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 지번이다. 매산리(梅山里). 조선조 초기에 어느 지관이 이  곳을 지나다가 이 땅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하였다. 매화꽃이 떨어진 자리, 라는 뜻이다. 아, 나는 이곳에서 뼈를 묻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매화꽃이 떨어진 자리’, 라니. 마치 나를 위한 지번 같았다(인간은 누구나 나르시스트다). 꽃이 떨어진 자리니, 얼마나 고요하고 아늑한 터인가. 실지로 그렇다. 공기부터 달랐다.


  연식이 좀 있는 아파트지만 씻은 듯이 깨끗하고 고요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따뜻했고 온화한 미소로 살짝 눈인사를 했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은 평화롭다. 집을 보러 왔을 때 아파트 앞의 후박나무 잎이 툭툭 지고 있었다. 아파트 뒤는 메타세콰이어 나무와 대추나무와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정원이다.  


  저번에 살던 아파트만 해도 내가 집을 팔았다고 하니, 위층의 여자가 보리쌀 소쿠리 쥐 눈처럼 반짝이며, 얼마에 계약했어요?, 하고 물었다.

  - 그런 건 묻는 게 아닙니다.

  내가 답했다.

  - 시세가 궁금해서 그렇지요.

  여자가 시퉁하게 대꾸했다. 


  참나, 시세가 왜 궁금한지 모르겠다. 이사할 것도 아니면서. 이 모든 것이 눈만 뜨면 미친 듯이 널뛰는 아파트값 때문이다. 아파트값이 미친 듯이 널뛰는 이유는 정책을 만드는 자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인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무시하는데 있다고 본다. 공급이 많이 된다는 믿음만 있으면 집값은 내려가게 돼 있다. 

  한 마디로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직장과 주거의 근접성 때문에 강남의 집값이 비싼 거는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는 수요만 있고 공급은 정치 논리로 막고 있으니 집값이 자고나면 오르는 것이다. 대책이라고는 규제와 세금만 때리고 있다. 정치하는 자들은 국민에게 관심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정권(政權)에만 촉각이 곤두서 있다. 


  위정자들에게도 푸르른 청운의 꿈을 꾸며 천하를 이롭게 할 뜻을 세우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뜻을 잊어버렸다. 왜 정치가가 되려했는지, 왜 정치를 하려했는지. 뜻을 잊어버렸는데 어찌 길을 찾겠는가. 다만 자신들의 보신(保身)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얼룩말 무리 같다. 


  수요를 억제하는 정책을 발표(2019. 12. 16)했다. 15억 이상 아파트는 대출이 안 되고, 9억에서 15억 사이 아파트는 담보 대출을 기존 40%에서 20%로 낮추었다. 현금 부자들만 집 사라는 것이다. 이젠 또(2020. 6.17) 투기지역에서 전세대출을 받아 3억 넘는 아파트를 사면 즉시 대출을 회수한단다. 실수요자는 안중에도 없고 젊은 부부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런 나라에서 누가 결혼을 할 것이며, 누가 아이를 낳겠는가. 마치 아마추어 위정자들이 국민을 실험 삼아 이런 정책, 저런 정책을 해 보는 것 같다. 지금까지 스물네 번이나 부동산 정책을 내놓았다. 공인중개사도 회계사도 특례에, 예외에, 유예 조치에, 뭐가 뭔지 모른다.(2020.9.1)


  - Let desire down. 

  욕망을 내려놓다, 라는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이 말이 머릿속에서 되풀이 됩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들어온 후배의 말이다. 외국 시민권자인 그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자, 지금은 와이프와 귀농을 도와주는 시골에서 산다.


  -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나도 그 마음 안다. 나는 강남을 떠나면서 욕망을 내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 앞 아파트를 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파트는 재개발을 했고, 수십억을 하는 아파트로 변신했다. 그걸 아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평온함이 잔잔한 물처럼 가슴에 차올랐다. 강남의 그 아파트를 놓을 때까지의 고심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도곡동 주공 아파트와 근처 대치동의 은마 아파트는 30년 전부터 재개발을 한다고 했다. 다행히 도곡 주공 아파트는 재개발이 되었지만, 은마 아파트와 잠실 주공 5단지는 아직도 언제 재개발이 될 지 알 수 없다. 


  대학원 때 지도교수가 은마 아파트에 살았는데, 퇴임 후 전원주택으로 가서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모님의 극렬 반대로 얼마 전 돌아가실 때까지 40여 년 간 그 좁고 노후 된 아파트에 사셨다. 재개발 호재로 수십억을 하면 무엇 하는가. 금밥을 먹을 것도 아니고, 접어서 관에 넣어갈 것도 아니면서.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노력 없이 받은 재물은 대부분 허공으로 흩어지는 게 삶이다. 물려받은 재물은 삼대를 가지 못한다. 대개 이대에서 끝난다. 만약 대대손손 잘산다면, 윗대 조상들이 적선을 많이 해서 복을 많이 저금해둔 집안일 것이라 생각한다. 


  눈만 뜨면 천정부지로 오르는 아파트 값에 초연할 수 있어, 비바, 뷰티플 라이프(viva beautiful life)다. 한 발 잘못 내디뎌 잠시 전세나 월세로 살려던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럴 경우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빨리 나처럼 Let desire down,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날아간 파랑새를 생각하며 뒤쫓다 보면 평생, 죽을 때까지 돈돈 하다 가는 수가 있다. 두 번째는 투표를 잘해서 부동산 정책을 잘 할 수 있는 정당을 뽑으면 된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만 손톱만큼이라도 나을 것 같은 쪽에 표를 주면 된다. 내게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마라. 나는 자유와 평등의 편이고, 대한민국의 편이고, 상식의 편이다.


  정치인은 국민을 지킬 책임이 있고, 군인은 국토를 지킬 책임이 있고, 예술가는 그들과 국민의 영혼을 지킬 책임이 있다. 하여 나는 글을 쓴다. 강남을 탈출할 수 있었으니, 저 미친 굿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나는 사람들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전화위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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